창신동의 가파른 골목길은 서울의 화려한 빌딩 숲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 낡은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오토바이들이 좁은 길을 분주하게 오가는 이곳은 JS 패션의 화려한 옷들이 태어나는 진짜 고향이었다.
"사장님, 아니 서준 씨. 정말 여기서 팝업을 열어도 괜찮을까요?"
다은은 낡은 한옥을 개조한 작은 작업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서준은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페인트칠을 돕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보다, 이 옷이 만들어진 땀방울이 맺힌 곳이 '리-본'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줄 겁니다. 다은 씨가 말했잖아요. 패션은 위로이자 용기라고.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달할 거예요."
서준의 형들이 백화점에서 수억 원을 들여 화려한 팝업 스토어를 준비하는 동안, 다은과 마케팅팀 소수 정예 멤버들은 창신동 골목 구석구석에 포스터를 붙이고 SNS에 '비밀 초대장'을 올렸다. 장인들의 손때 묻은 가구들을 전시대로 쓰고, 원단 자투리로 만든 소품들이 공간을 채웠다.
팝업 오픈 당일,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졌다. 다은은 발을 동동 굴렀다. "비가 이렇게 오면 아무도 안 올 텐데... 어떡하죠?"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화려한 모델이 아닌, 진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한 이들이었다. 다은은 비에 젖은 손님들에게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잔씩 건네며 옷에 담긴 스토리를 설명했다.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될 무렵,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다른 스태프들이 짐을 싣고 먼저 떠난 뒤, 다은과 서준은 뒷정리를 위해 좁은 작업실에 남게 되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다은 씨.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비오는 골목까지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 겁니다."
서준은 젖은 수건으로 다은의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고, 좁은 공간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다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야말로요. 사장님이 저를 믿고 이 장소를 선택해주셔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저... 사실 처음에 라떼 쏟았을 때, 제 인생이 끝난 줄 알았거든요."
서준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생각했어요. 내 무채색 수트에 이렇게 뜨거운 색을 입히는 사람이라면, 내 인생도 바꿔놓을 수 있겠다고."
서준은 닦아주던 수건을 내려놓고 다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빗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다은 씨. 나는 이제 사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당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쏟은 라떼가 내 심장까지 적셔버린 것 같아요. 이제는 내가 당신의 갑옷이 되고, 당신의 위로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서준의 진심 어린 고백에 다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울의 낡은 골목, 빗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맞닿았다. 빗물 섞인 라떼처럼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작업실 밖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준의 형들이 보낸 사람이 비웃음을 흘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들을 향한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도 소리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다음 회 예고] "스캔들인가, 로맨스인가?" 창신동에서의 키스 사진이 전 매체에 퍼지며 JS 패션은 발칵 뒤집힌다. 서준은 경영권 방어와 사랑 사이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다은은 서준을 위해 스스로 회사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