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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4화:파도가 삼킨 순간, 그리고 너

by AK98 2026. 7. 1.

태현과 노을빛 바다를 보며 깊은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청호리의 날씨는 눈이 시릴 정도로 맑았다.

박 씨 할머니의 ‘금손’ 소문 덕분인지 치과에는 아침부터 환자들의 발길이 제법 이어졌다. 스케일링을 하러 온 젊은 어부, 틀니 조정을 원하는 할아버지까지 치료하는 동안 윤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몸은 고되었지만, 서울에서 느꼈던 기계적인 피로와는 결이 달랐다. 환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일은 윤서의 텅 비어 있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 창밖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던 윤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날씨는 맑았는데, 먼바다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해안가로 밀려드는 파도가 오전보다 훨씬 거세고 높아져 있었다.

‘오늘 바람이 꽤 부네….’

그때 문득 어제 태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후에 초보 서퍼들을 데리고 강습을 나간다고 했던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창가로 다가가 바다를 주시하는데, 멀리 해변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다급하게 손짓을 하며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순간, 윤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치과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선 순간, 해변 쪽에서 헐떡이며 달려오는 마을 청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원장님! 원장님! 큰일 났어요! 태현이 형이… 태현이 형이 바다에서…!"

그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윤서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번져갔다. 가운을 벗을 새도 없이, 윤서는 슬리퍼를 신은 채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모래사장으로 달리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안 돼,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모래사장에 도착하자, 이미 몇몇 주민들과 서핑 숍 회원들이 물가에 모여 있었다. 거센 파도 너머로 뒤집힌 보드 한 장이 위태롭게 떠돌고 있었고, 저 멀리서 태현이 한 초등학생 아이를 한 팔로 안은 채 필사적으로 파도를 헤쳐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너울성 파도에 튜브를 타고 놀던 동네 아이가 휩쓸려 갔고, 그걸 본 태현이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든 것이었다.

"태현 씨!"

윤서가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이를 모래사장 위로 무사히 올려놓았다. 아이의 부모가 울며 아이를 감싸 안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윤서의 시선은 오직 태현에게만 꽂혀 있었다.

태현은 모래밭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허벅지 아래로 붉은 피가 모래를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 잠겨 있던 날카로운 갯바위에 긁힌 모양이었다.

"태현 씨, 다쳤잖아요! 피가…"

윤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현의 곁에 주저앉았다. 태현은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으면서도, 윤서를 보자마자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헉… 헉… 괜찮아요, 원장님. 애는… 애는 무사하니까 다행입니다. 그냥 살짝 긁힌 거예요."

"바보같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윤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서울의 차가운 수술실에서 숱한 피를 보았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태현을 보는 순간, 심장이 통째로 도려내지는 듯한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이 태현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미 단순한 호의의 수준을 넘어섰음을, 윤서는 이 잔인한 순간에 깨닫고 말았다.

윤서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어설 수 있겠어요? 제 어깨 잡으세요. 빨리 치과로 가요!"

주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태현을 겨우 치과 진료실로 옮겼다. 윤서는 곧바로 소독약과 거즈, 봉합 도구를 챙겼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깨어난 윤서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졌지만, 소독약을 쥐고 있는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태현을 진료 의자에 눕히고 바지를 걷어 올리자, 생각보다 깊게 찢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소독할 때 조금 아플 거예요. 꽉 잡으세요."

"원장님 손 보니까… 아픈 줄도 모르겠는데요. 손이 왜 이렇게 떨려요."

태현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서는 입술을 꽉 깨물며 상처를 소독했다. 쓰라린 통증에 태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윤서는 정교한 솜씨로 찢어진 상처를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다. 고요한 진료실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와 창밖의 파도 소리만 어우러졌다.

마지막 매듭을 짓고 거즈를 붙인 후에야 윤서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려 진료용 의자 옆 둥근 보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보 같아요, 정말."

윤서가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말했다.

"그 넓은 바다에 혼자 그렇게 뛰어들면 어떡해요? 만약에… 만약에 태현 씨까지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녀의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태현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따뜻하고 묵직한 윤서의 눈물에 태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태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윤서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요, 윤서 씨."

늘 ‘원장님’이라고 부르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다친 덕분에 알았네요."

태현이 윤서의 눈을 맑게 응시하며 속삭였다.

"윤서 씨가 나를 이만큼이나 걱정해 준다는 걸요."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고, 석양이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한 진료실 안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윤서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5화 예고] 사고 이후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 태현의 다리 치료를 핑계로 윤서는 매일 그의 서핑 숍을 드나들게 됩니다. 그러던 중, 청호리에 윤서의 과거를 뒤흔들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