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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1화:꽃과 바다의 방어전

by AK98 2026. 7. 18.

부모님이 떠난 지 이틀 뒤, 청호리 포구의 아침은 지독하게 짙은 안개로 시작되었다.

윤서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치과 문을 열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이 원장의 묵직한 퇴장 이후 민우가 어떤 극단적인 방법을 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포구 진입로 쪽에서 거친 기계음과 함께 대형 트럭 두 대와 주황색 굴착기 한 대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트럭에서 내린 이들은 검은색 바람막이를 맞춰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었다. 강제 철거를 집행하기 위해 민우가 동원한 철거 용역들이었다.

민우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사내들의 맨 앞에 서서 확성기를 잡았다.

“청호리 주민 여러분, 그리고 이윤서 원장님. 이 건물은 사유지이며 법적 철거 승인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지금 즉시 내부 집기를 반출하고 퇴거해 주시기 바랍니다. 협조하지 않을 시 법적 조치와 함께 강제 철거를 진행하겠습니다.”

민우의 목소리는 바닷바람을 타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 윤서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가운 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아래로 내려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때 치과 문을 열고 들어온 태현이 윤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요, 윤서 씨.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줄 때가 됐습니다.”

태현의 맑고 단단한 눈빛을 보자 신기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태현과 윤서가 건물 밖으로 내려왔을 때, 포구 앞 광장에는 이미 청호리 주민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몽둥이나 쇠파이프를 들고 대치하는 험악한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주민들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꽃바구니와 화분, 붓과 페인트, 그리고 맛있게 쪄낸 감자와 식혜가 들려 있었다.

“어이, 서울 총각! 아침부터 목청 좋네. 멀리서 오느라 배고플 텐데 뜨끈한 감자나 하나 먹고 시작해라!”

어촌계장님이 너스레를 떨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바구니를 용역 대장 앞으로 내밀었다. 용역들은 당황한 듯 서로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그 순간, 태현이 대기시켜 둔 음향 장비에서 청량한 하와이안 서프 뮤직이 흘러나왔다. 숍 회원들과 청년회 멤버들은 굴착기 주변으로 예쁜 파스텔톤 꽃바구니를 촘촘히 놓아두기 시작했다. 험악한 쇳덩이 굴착기가 순식간에 꽃밭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야? 당장 치우지 못해!”

민우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태현은 여유롭게 다가가 휴대폰 화면을 민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 안에는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시청자 수가 보였다.

“한민우 씨, 지금 이 상황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국으로 실시간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타이틀은 ‘대기업의 청정 어촌 및 역사 보존 건축물 불법 철거 현장 실시간 감시’입니다.”

태현의 말에 민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게다가 어제 자로 이 건물은 청호리 어촌계와 역사학계 이름으로 ‘근대 문화 보존 가치 건물 지정 신청’ 및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우회 편법 개발 의혹’으로 시청과 언론사에 공식 접수되었습니다. 지금 저 꽃들을 밟고 이 건물을 한 치라도 훼손하는 순간, 귀사 브랜드의 도덕성은 바닥을 치게 될 겁니다. 실시간 댓글 반응 한 번 보실래요?”

화면에는 이미 ‘대기업 갑질 심하다’, ‘저 아름다운 바닷가 치과를 왜 허무냐’, ‘불법 편법 개발 철저히 조사해라’ 등의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청년들이 용역들과 민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자, 당황한 용역 사내들은 슬금슬금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윤서 역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운을 입은 당당한 의사의 모습으로 민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민우 씨. 당신이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이곳에선 통하지 않아. 여긴 사람들의 삶이 있고, 역사가 있고, 우리를 지켜주는 따뜻한 연대가 있어. 이 건물을 허물려면, 먼저 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부터 허물어야 할 거야.”

윤서의 단호한 선언에 주민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맞다! 우리 금손 원장님 치과는 우리가 지킨다!” “불법 철거 물러가라!”

분위기가 완전히 주민들 쪽으로 기울자, 용역 대장은 민우에게 다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한 사장님, 이건 분위기가 다릅니다. SNS 라이브에 기자들까지 오고 있다는데, 여기서 억지로 밀어붙였다간 저희 업체도 매장당합니다. 오늘은 철수하겠습니다.”

“야! 너희 돈 받고 뭐 하는 거야? 당장 밀어버려!”

민우가 이성을 잃고 소리쳤지만, 용역들은 장비를 챙겨 서둘러 트럭에 올라탔다. 굴착기마저 덜컹거리며 포구를 빠져나가자, 민우는 홀로 안개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의 완벽하게 다려진 수트가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민우는 이를 악물며 윤서와 태현을 노려보았다.

“이혜윤… 공태현… 너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법은 내 편이야.”

“법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태현이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제발 그 이름 좀 제대로 불러주시죠. 이분은 이혜윤이 아니라, 우리 청호리의 이윤서 원장님입니다.”

민우는 결국 굴욕감에 휩싸여 자신의 은색 세단에 올라타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포구를 빠져나가자, 안개가 걷힌 푸른 바다 위로 따뜻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와아아아!”

주민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박 씨 할머니는 윤서의 손을 꼭 쥐며 눈물을 글썽였고, 어촌계장님은 태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뜨거운 연대 속에서, 윤서와 태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현이 다가와 윤서의 손을 가만히 잡았고, 윤서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맞잡았다. 서울에서 온 거센 바람도, 청호리의 흙을 딛고 선 그들의 단단한 뿌리를 흔들 수는 없었다.

 

[이어지는 12화 예고] 평화적인 방어전의 승리로 청호리 치과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고, 윤서와 태현은 밀려드는 환자와 관광객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한편,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민우는 마지막 수단으로 윤서 부모님의 병원 네트워크를 이용해 치과의 약품 공급을 차단하려는 비열한 음모를 꾸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