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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0화:서울에서 온 바람, 그리고 단단한 뿌리

by AK98 2026. 7. 16.

포구 앞 천막에서 주민들의 뜨거운 연대를 느끼며 눈시울을 붉히던 그날 오후, 청호리 치과 앞마당에 어제와는 또 다른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조용한 바닷가 시골길에 어울리지 않는, 광택이 흐르는 최고급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우아한 트위드 재킷을 입은 중년 여성과 굳은 표정의 신사였다. 윤서의 어머니, 송혜숙 여사와 아버지 이찬영 원장이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한민우가 승리감에 도취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치과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발견한 윤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울을 떠나온 이후 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거대한 벽이 기어코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혜윤아!”

치과 문을 열고 들어선 송 여사는 대기실을 둘러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그 좋은 병원 다 마다하고, 이런 구석진 시골 어촌에 와서 조그만 치과나 열고 앉아 있다니!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해괴망망한 짓이냐!”

아버지 이 원장 역시 굳은 얼굴로 윤서를 엄하게 바라보았다.

“이혜윤. 당장 짐 싸라. 민우에게 대강의 사정은 들었다. 더는 우리 집안 망신 시키지 말고 서울로 올라가서 네가 하던 일 마저 정리해.”

그들의 목소리에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신들이 공들여 쌓아 올린 ‘완벽한 가족’이라는 성벽에 흠집이 났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의 윤서였다면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서는 달랐다. 그녀는 가운 옷깃을 단정히 여미며 부모님을 똑바로 응시했다.

“엄마, 아빠. 제 이름은 이혜윤이 아니라 이윤서예요. 그리고 전 도망친 게 아니에요. 여기서 제 힘으로 진짜 의사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의사? 고작 이런 시골 구석에서 노인네들 틀니나 맞춰주는 게 진짜 의사란 말이냐!”

송 여사의 날카로운 외침이 텅 빈 대기실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치과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태현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따뜻하게 우려낸 국화차 쟁반이 들려 있었다. 태현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 원장님 부모님 되시는군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청호리에서 자란 국화로 만든 차인데, 먼저 한 잔 드시고 말씀 나누시지요.”

“당신은 또 뭐야? 민우가 말한 그 동네 장사꾼인가?”

송 여사가 경멸 어린 눈빛으로 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태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맑은 눈으로 부모님을 대면했다.

“네, 청호리에서 서핑 숍을 운영하는 공태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원장님이 이곳에서 얼마나 훌륭한 의사인지, 또 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태현은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서울에서 원장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는 제가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곳 청호리에서 원장님은 아침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진심으로 웃으십니다. 돈이나 명예보다 환자의 아픔을 먼저 살피는 진짜 의사가 되셨어요. 어르신들은 원장님 덕분에 아픈 이뿐만 아니라 마음의 위로까지 받고 계십니다.”

“말재주가 좋은 청년이군. 하지만 우리 딸의 미래는 자네 같은 시골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네.”

이 원장이 차갑게 선을 그었다.

“책임이라는 건 누군가의 삶을 가두고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빛났다.

“저희는 원장님의 삶을 흔드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되어 드릴 뿐입니다. 결정은 오롯이 원장님의 몫이고, 저희는 그 결정을 끝까지 믿고 지지할 겁니다.”

태현의 단단한 태도와 막힘없는 말솜씨에 이 원장은 묘한 충격을 받은 듯 침묵했다. 민우는 예상치 못한 태현의 반론에 초조해진 듯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버님, 어머님. 이 친구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래 봤자 법적으로 건물이 철거되면 이 치과도 끝입니다. 혜윤이를 위해서라도 빨리 서울로 데려가야 합니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윤서가 태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태현의 손길이 닿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용기가 솟구쳤다.

“엄마, 아빠. 저 서울 안 가요. 설령 이 건물이 철거된다 해도, 전 청호리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는 절 믿어주는 주민들이 있고, 무엇보다 절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고 지켜주는 태현 씨가 있어요.”

윤서의 확고한 선언에 송 여사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뒤로 넘어갈 듯했고, 민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원장은 맞잡은 윤서와 태현의 손, 그리고 딸의 눈동자 속에 서린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인한 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부모의 뜻대로 움직이던 유약한 딸은 간데없고, 청호리의 거친 파도를 닮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자.”

이 원장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당장 짐을 싸 들고 가기는 틀린 것 같군.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

“아니, 여보! 이대로 그냥 간다고요?”

송 여사가 펄펄 뛰었지만, 이 원장은 돌아 서서 묵묵히 치과를 나섰다. 민우는 당황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차가 포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서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장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윤서를 태현이 든든하게 안아주었다.

“잘했어요, 윤서 씨. 아주 멋졌습니다.”

“태현 씨… 고마워요. 내 곁에 있어 줘서.”

붉게 물드는 청호리의 노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에도 두 사람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더 깊고 단단하게 땅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어지는 11화 예고] 부모님의 방문 이후 갈등은 깊어만 가고, 민우는 치과 건물의 강제 철거를 집행하기 위해 용역들을 동원하려 합니다. 이에 맞서 태현과 청호리 사람들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기발하고도 따뜻한 ‘청호리식 방어전’을 준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