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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6화:무너진 오만과 마침내 찾은 이름

by AK98 2026. 7. 28.

다음 날 아침, 청호리 포구는 어제까지의 음산했던 안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걷히고 눈부신 햇살로 가득했다.

치과 문 앞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리던 윤서의 눈앞에 이른 아침 첫 버스에서 내린 태현의 모습이 보였다. 태현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윤서가 달려가자 태현은 환하게 웃으며 서류 봉투를 들어 보였다.

"윤서 씨! 다 끝났습니다. 이제 치과 문 환하게 엽시다."

태현의 말과 함께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치과 앞으로 보건소 의약과 과장과 윤리위원회 관계자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냉정하게 차트를 수거해 가던 그들의 표정에는 완연한 당혹감과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이윤서 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강남 병원 측 및 법무법인 한성에서 제출했던 수술 진단서와 엑스레이 자료가 전부 고의로 날짜가 조작된 공문서위조임이 경찰 수사 결과 및 국립법의학연구소 검증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의신청서가 전격 수용되어 현장 진료 중단 명령 및 면허 정지 행정처분은 이 시간 부로 전면 철회 및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보건소 과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치과 내부를 눌러쓰고 있던 차가운 긴장감은 한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원장님! 진짜요? 우리 이제 다시 진료할 수 있는 거예요?"

경희가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윤서를 끌어안았고, 소식을 듣고 치과로 달려온 어촌계장님과 어르신들은 포구 가득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박 씨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 온 따끈한 시루떡을 접수대에 올려놓으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그렇지! 우리 금손 원장님이 어떤 사람인데, 하늘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모함을 해!"

마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태현과 윤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억울하게 빼앗길 뻔했던 가운과 명예를 드디어 되찾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롭고 경사스러운 시간도 잠시, 치과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다려진 수트는 온데간데없이 구겨져 있었고, 포마드로 올려 붙였던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남성. 바로 한민우였다.

"이혜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민우는 충격과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윤서를 향해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서울 고검과 경찰청에서 날아온 '무고, 업무방해 및 공문서위조, 협박 혐의'에 관한 피의자 출석 요구서가 쥐어져 있었다.

"우리 회사 법무팀 변호사까지 검찰 조사를 받게 생겼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니? 내가 너한테 한 일이 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짓인 줄 알아? 다 너 서울로 데려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잖아!"

민우는 이성을 잃은 채 윤서의 어깨를 잡으려 다가섰다. 늘 우아하고 오만하게 남 위에 서 있던 대기업 상무 한민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허물에 제가 걸려 넘어진 자의 비참하고 추악한 구걸일 뿐이었다.

그때, 태현이 윤서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민우의 손목을 꺾듯 낚아챘다. 태현의 서늘한 눈빛이 민우의 얼굴에 꽂혔다.

"한민우 씨, 더는 선 넘지 마시죠. 윤서 씨는 당신의 이기적인 소유욕을 채워주는 인형이 아닙니다."

"이 시골 놈이 어디서 감히! 이혜윤, 너 진짜 나를 이렇게 법정에 세워서 매장시킬 작정이야? 아버님, 어머님 얼굴을 봐서라도 고소 취하해!"

민우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과거의 윤서였다면 부모님의 이름과 과거의 정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서는 이제 거대한 폭풍을 견뎌낸 단단한 나무였다.

윤서는 태현의 어깨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민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미련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깊은 연민과 단호함만이 서려 있었다.

"한민우 씨."

윤서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명확했다.

"당신이 한 짓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오만을 지키기 위한 비열한 범죄였어. 그리고 당신이 부르는 '이혜윤'은 이미 죽었어. 난 내 힘으로 환자를 살리고,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청호리의 이윤서야."

윤서는 민우가 내민 출석 요구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법의 처벌을 받아. 그게 당신이 저지른 무모함에 대해 세상과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니까. 고소 취하는 절대 없어."

"혜윤아…! 제발, 제발 부탁이다… 내가 잘못했다, 응?"

무릎을 꿇을 듯 구걸하는 민우를 향해 태현이 냉정하게 치과 문을 열어젖혔다.

"나가시죠, 한민우 씨.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시면 법원 제출 서류에 한 줄이 더 추가될 뿐입니다."

결국 민우는 자신이 만든 거대한 죄의 대가 앞에 비틀거리며 치과 밖으로 쫓겨났다. 바닷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초라한 뒷모습은, 거대한 돈과 권력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석양이 동해 바다를 온통 붉고 화려한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윤서와 태현은 나란히 치과 뒤뜰 평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셨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이 잡은 손만큼은 더없이 따뜻했다.

"태현 씨, 정말 고마워요. 내 진짜 이름을 찾아줘서… 그리고 내 삶을 지켜줘서."

윤서가 태현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태현은 다정하게 윤서의 정수리에 턱을 괸 채 잔잔하게 부서지는 은빛 윤슬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잖아요. 윤서 씨가 어디에 있든, 내 바다는 윤서 씨를 지킬 거라고요."

과거의 어두운 사슬은 완벽하게 끊어졌다. 이제 두 사람 앞에는 청호리의 눈부신 바다처럼 넓고 찬란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17화 예고] 한민우의 몰락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윤서의 부모님이 다시 청호리를 찾아옵니다. 달라진 딸의 눈빛과 태현의 진정성을 확인한 부모님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