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의사 선생. 내 평생 이 뽑는 기계 앞에서는 멧돼지 만났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뛴다 안 카나. 살살 해 주이소, 살살…"
진료 의자에 누운 박 씨 할머니의 두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하루에만 수십 명의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긴장감이 윤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곳에서의 첫 진료이자, 청호리 주민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윤서는 깊고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차갑게 굳은 손목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마취할 때 조금 뻐근하고 나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 제가 아주 천천히,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저 믿으시죠?"
윤서의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고 다정했다.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눈높이를 맞추고 생긋 웃어 보였다. 서울 치과에서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생략하곤 했던 따뜻한 눈맞춤이었다.
정밀 검사 결과, 어금니 안쪽에 심한 충치가 생겨 신경까지 침범한 상태였다. 윤서는 솜씨 좋게 마취 주사를 놓고, 최신 장비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치료를 시작했다. 손끝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 소리 사이로, 창밖에서 들려오는 청량한 파도 소리가 긴장을 녹여주는 듯했다.
"자, 어머님. 다 끝났어요. 조금 뻐근하시죠? 입 안 헹구셔요."
"어라? 벌써 끝났는교? 이 벌써 다 한 기라?"
할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컵을 받아 들었다. 이가 욱신거리던 극심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연신 아랫입술을 들치고 어금니를 확인하더니, 이내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참말로 금손이네! 서울 의사라 카더니 손 기술이 신선이 따로 없다야! 하나도 안 아팠다, 참말로!"
할머니는 진료실을 나가면서 연신 고맙다며 윤서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박 씨 할머니의 '안 아프게 이 치료하는 서울 금손 의사'라는 소문이 청호리 노인정과 부녀회에 삽시간에 퍼진 것이다.
대기실의 조용하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고, 오후에는 무릎이 쑤신다며 유모차를 끌고 온 김 할머니, 이가 시리다며 찾아온 어촌계장님까지 서너 명의 환자가 치과를 찾았다. 첫날 치고는 아주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나니 치과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윤서는 가운을 벗어 걸고 가벼운 카디건을 걸쳤다. 그리고 접수대 위에 놓인 태현의 전복 껍데기 화분을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못 했네.'
윤서는 태현이 운영한다는 서핑 숍을 찾아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호리 해변은 저녁노을빛을 받아 온통 오렌지빛과 보라색이 뒤섞인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래사장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빈티지한 나무 외벽에 따뜻한 알전구들이 환하게 켜진 이국적인 건물이 나타났다. '청호 웨이브(Cheongho Wave)'라는 간판이 파도 모양으로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문 앞에 서자 청량한 서프 뮤직이 흘러나왔고, 이국적인 향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 윤서 씨!"
안쪽에서 보드를 닦고 있던 태현이 윤서를 발견하고 밝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서핑 수트를 반쯤 내리고 허리에 묶은 그의 모습은 낮에 보았던 '동네 맥가이버'일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탄탄하게 다져진 넓은 가슴과 어깨, 바다의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듯한 건강한 멋이 흘러넘쳤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쩐 일이세요? 치과 첫날은 잘 마쳤습니까?"
"네, 태현 씨 덕분에요. 박 할머니 소문 덕에 오후에 환자분들이 꽤 오셨어요. 이거, 낮에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화분도 너무 예뻐서… 감사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윤서가 수줍게 웃으며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챙겨온 고급 드립 백 커피 세트였다.
"와, 제가 커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잘 마실게요."
태현은 선물을 흔들어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숍 뒤편에 마련된 야외 테라스 데크로 윤서를 안내했다. 테라스 바로 앞은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목재 의자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청호리 노을, 정말 예쁘죠?"
태현이 바다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옆모습에 붉은 노을빛이 아스라이 어려 있었다.
"네… 서울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는데, 여기는 온 세상이 그림 같네요."
"처음엔 심심할 수도 있어요. 편의점 가려면 차 타고 한참 나가야 하고, 밤이 되면 정말 고요하거든요. 그래도 이 바다가 주는 위로가 꽤 큽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의 먼지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태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윤서의 굳어 있던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결혼의 실패, 부모님에 대한 반항,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까지. 그 모든 무거운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태현의 따뜻한 음성과 잔잔한 파도 소리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태현 씨는… 어떻게 이 시골 마을에서 계속 살게 되신 거예요? 서울로 가고 싶진 않으셨어요?"
윤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태현이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쓸쓸한 듯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서울에 있었어요. 대학도 거기서 나오고 직장 생활도 해봤는데… 매일매일이 경쟁이고,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고향 청호리 바다가 너무 그리워졌어요.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던 이 바다가요."
태현의 눈빛은 아주 깊고 단단했다. 남들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선택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었다. 윤서는 그런 태현의 모습을 보며 가슴속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 선택… 정말 멋지네요."
윤서가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태현이 고개를 돌려 윤서와 시선을 맞추었다. 은빛 파도가 두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느덧 청호리의 밤하늘에 하나둘 별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이어지는 4화 예고]
서로의 과거와 상처를 조금씩 공유하게 된 두 사람. 그러던 어느 날, 태현이 타던 서핑 보드가 뒤집히며 아찔한 바다 조난 사고가 발생하는데?! 윤서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 그날 밤의 소동이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