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하늘은 늘 회색빛 빌딩숲에 가려 숨이 막혔다. 강남의 한 대형 치과에서 페이닥터로 일하던 윤서에게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은 폭풍우와도 같았다. 3년을 만났고, 당연히 미래를 함께할 줄 알았던 전 남자친구와의 결혼은 집안의 격차와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라는 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집안에 들어가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어머니의 날카로운 음성과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던 전 남자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부모님이 정해준 안락한 궤도에서 단 한 번도 이탈한 적 없던 모범생 윤서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반항심이 싹텄다.
‘내가 원하는 삶은 내가 결정해.’
윤서는 사표를 던졌고, 모아둔 예금과 대출을 끌어모아 연고도 없는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 ‘청호리’로 내려왔다. 지도를 펼치고 치과가 없는 가장 먼 바닷가 마을을 고른 결과였다.
청호리의 아침은 서울과 전혀 달랐다. 코끝을 스치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창문을 두드리는 청량한 파도 소리. 윤서는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자신이 새로 개원할 ‘바른 바다 치과의원’의 문을 열었다. 낡은 2층짜리 어촌계 건물 상가를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하지만 개원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서울에서 주문한 최신식 유니트 체어와 의료 장비들이 가득 실린 트럭이 도착했는데,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었다.
“아이고, 선생인교? 이 무거운 걸 우째 둘이서 다 옮긴다요? 인부라도 더 불렀어야지!”
트럭 기사 아저씨가 땀을 닦으며 난감해했다. 윤서 역시 당황해 발을 동동 굴렀다. 가운을 입기도 전에 이삿짐센터 직원이 된 기분이었다. 기사 아저씨와 함께 커다란 박스를 붙잡고 낑낑대며 계단을 한 칸 올랐을 때, 뒤에서 낮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조심하셔야죠. 잘못하면 허리 나갑니다.”
윤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밀짚모자를 쓰고, 햇볕에 기분 좋게 그을린 건강한 피부를 가진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장난기가 살짝 서린, 하지만 깊고 맑은 눈동자가 윤서의 시선과 마주쳤다.
“누구…?” “아, 이번에 새로 오신 치과 원장님이시구나. 반갑습니다. 저 이 마을 사는 공태현이라고 합니다.”
태현은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모자를 벗어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사님, 저랑 같이 들죠. 원장님은 뒤에서 중심만 잡아주세요. 이런 건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태현의 등장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그는 보기보다 힘이 엄청나게 장사였다. 무거운 장비들을 번쩍번쩍 들면서도, 계단 구석에 긁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방향을 지시했다. 그의 넓은 등에서 배어 나오는 땀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서울에서 보던 세련되고 깍듯하지만 어딘가 차가웠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건강하고 따뜻한 에너지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비가 치과 내부로 무사히 안착했다. 윤서는 숨을 몰아쉬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 음료 두 개를 꺼내 태현에게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현 씨 맞으시죠? 태현 씨 아니었으면 오늘 내로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하하, 별말씀을요. 마을에 드디어 치과가 생기는데 이 정도 품앗이는 당연하죠. 어르신들 맨날 차 타고 읍내까지 나가느라 고생하셨거든요.”
태현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치과 내부를 슥 둘러보았다. 하얗고 깔끔하게 정돈된 인테리어가 푸른 창밖 바다 풍경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인테리어 예쁘네요. 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아, 그런데 저 간판은 아직 고정이 덜 된 것 같은데요?”
태현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창밖 테라스에 임시로 걸려 있는 ‘바른 바다 치과’라는 은빛 간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앗, 아저씨가 바쁘시다고 내일 와서 마저 고정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에이, 오늘 밤에 바다 바람 세게 분다는데 저러다 떨어지면 큰일 납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태현은 치과를 나가더니 어디선가 큼지막한 공구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능숙하게 전동 드릴을 다루며 간판을 벽에 단단히 고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윤서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태현 씨는… 혹시 인테리어 업자 분이세요?” 윤서의 질문에 태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이 마을 맥가이버예요. 필요하면 용접도 하고, 배선도 보고, 보일러도 고치고… 아, 원래 직업은 서핑 샵 운영하고 배도 한 척 몰아요.”
다재다능하다 못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었다. 서울에서는 오직 간판과 스펙, 직업의 타이틀로만 사람을 평가하곤 했다. 치과의사인 자신과 대기업에 다니던 전 남자친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곳 청호리의 태현은 그 어떤 명함보다도 단단하고 쓸모 있는 존재감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자, 다 됐습니다! 이제 태풍이 와도 안 떨어질 겁니다.”
태현이 만족스러운 듯 손을 털며 웃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 위로 청호리의 맑은 햇살이 부서졌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떠밀려 온 반항의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이 작은 마을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고마워요, 태현 씨. 덕분에 무사히 개원할 수 있겠어요.” “웰컴 투 청호리, 원장님. 앞으로 자주 봐요.”
태현이 손을 흔들며 치과 문을 나섰고, 딸랑이는 도어벨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푸른 바다 위에 은빛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윤서의 새로운 삶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2화 예고] 본격적인 개원 첫날! 하지만 손님은커녕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어버린 치과? 그리고 태현이 윤서에게 건넨 뜻밖의 환영 선물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