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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5화:매일 너에게 가는 길, 그리고…

by AK98 2026. 7. 4.

그날 밤 이후, 윤서의 아침은 이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묶었다가 풀기를 서너 번, 결국 평소처럼 단정하게 흘러내리는 반묶음 머리를 하고서야 윤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거울 속 자신의 뺨이 발갛게 가라앉지 않는 것은 단지 아침 햇살 탓이 아니었다.

‘윤서 씨.’

태현이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가, 그리고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던 그 단단한 손길이 자꾸만 귓가와 살결에 맴돌았다. 서울에서의 상처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봄볕을 맞은 눈처럼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원장님, 오늘 오전 진료 끝나고 또 ‘청호 웨이브’ 가시는 거죠?”

마침 소독 기구를 정리하던 조무사 경희가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 윤서는 짐짓 차분한 척 소독약 상자를 가방에 넣으며 대답했다.

“네, 봉합 상처는 초기 소독이 중요하니까요. 바닷가라 염증 생기기도 쉽고… 의사로서 당연히 가봐야죠.”

“에이, 왕진까지 가시는 의사 선생님은 요즘 서울에도 없겠어요. 태현 씨가 복이 터졌네, 복이 터졌어.”

경희의 유쾌한 농담에 윤서는 괜히 볼을 붉히며 서둘러 치과 문을 나섰다.

오후의 청호리 해변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 위에 은빛 윤슬이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윤서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콧노래를 실어 태현의 서핑 숍으로 향했다.

“계세요?”

문가에 달린 맑은 종소리와 함께 들어선 ‘청호 웨이브’ 안에는 은은한 향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태현은 카운터 안쪽에서 한 손에 샌드페이퍼를 들고 서핑 보드를 다듬고 있었다. 다친 다리 때문에 왼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면서도, 윤서를 보자마자 얼굴 가득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 윤서 씨 왔어요?”

이제 ‘원장님’이라는 호칭은 두 사람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친 사람이 왜 꼼짝 않고 누워있지 않고 일을 해요? 얼른 이쪽으로 앉으세요.”

윤서가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며 테라스 앞 목재 소파로 태현을 이끌었다. 태현은 순순히 윤서의 지시에 따르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다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윤서가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덧나지 않고 빨갛게 잘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핀셋으로 거즈를 집어 소독약을 톡톡 바르자, 태현의 다리 근육이 찰나에 움찔했다.

“아파요? 미안해요, 살살할게요.”

윤서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상처 부위에 맑은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그 순간, 태현의 숨소리가 우뚝 멈췄다. 윤서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태현이 귀끝까지 붉어진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봐요? 많이 쓰라려요?”

“아니요… 그냥, 심장에 너무 해로워서요.”

태현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윤서 씨가 이렇게 매일 치료해 주니까, 다리가 평생 안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흉터 크게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윤서는 짐짓 쌀쌀맞게 대꾸하면서도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태현에게 들릴까 봐 붕대를 감는 손길에 애써 온 힘을 집중했다. 하지만 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핑크빛 기류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치료가 끝나고, 태현이 내린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부드러운 파도 소리만 가득하던 서핑 숍 앞마당으로, 이 한적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은색 광택이 번쩍이는 서울 번호판의 최고급 외제 세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선 것이었다.

윤서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말끔하게 다려진 수트 차림에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가 내렸다. 청호리의 흙먼지와 어촌 풍경 속에서 그는 이질적이다 못해 인위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는 주변을 불쾌한 듯 슥 둘러보더니, 이내 테라스에 태현과 나란히 앉아 있는 윤서를 발견하고 눈빛을 굳혔다.

“이혜윤.”

남자의 입에서 윤서의 본명이 흘러나왔다. 서울 치과에서 불리던, 그리고 그 차가운 집안에서 불리던 무거운 이름.

윤서의 전 약혼자이자,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자신을 허무하게 놓아버렸던 남자, 한민우였다.

민우는 성큼성큼 테라스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그의 시선은 윤서의 가벼운 옷차림, 그리고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태현의 헐렁한 셔츠와 반바지를 훑으며 묘한 경멸과 불쾌함을 드러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연락도 안 받고, 이런 구석진 시골에서 치과를 열었다더니… 정말 미쳤어?”

민우의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가 평화롭던 서핑 숍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윤서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그때, 태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픈 다리 때문에 조금 비틀거렸지만, 그의 넓은 어깨는 윤서의 앞을 단단하게 가로막아 서며 민우의 시선을 차단했다.

태현의 늘 장난기 넘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다 깊은 곳처럼 차갑고 단단한 눈빛이 민우를 향했다.

“손님,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숍 영업 중입니다. 무례하게 소리부터 지르시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요.”

두 남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 청호리의 고요한 바다 위에, 거대한 폭풍우의 전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6화 예고] 윤서를 데려가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민우는 돈과 권력을 무기로 태현을 은근히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흔들리는 윤서와 그런 윤서를 묵묵히 지키려는 태현의 깊어지는 갈등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