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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7화:밤바다에 흐르는 달빛 윤슬

by AK98 2026. 7. 10.

민우는 쉽게 청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간 줄 알았건만, 그는 마을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해변 리조트에 장기 투숙을 하며 치과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즈음에는 고급 레스토랑의 도시락이 치과로 배달되기도 했고, 퇴근길 길목에는 어김없이 그의 은색 세단이 서 있어 윤서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민우는 직접 다가와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자신이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시위하며 윤서의 일상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었다.

‘난 결국 그 세계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진료실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은색 세단을 바라보던 윤서의 한숨이 깊어졌다. 서울에서의 아픈 기억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라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았다.

“원장님,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무슨 고민 있어요?”

퇴근을 준비하던 조무사 경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윤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경희 씨. 요즘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그런가 봐요. 얼른 퇴근해 보세요.”

경희를 먼저 보내고 텅 빈 치과에 홀로 남은 윤서는 책상에 엎드렸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파도 소리가 평소보다 더 쓸쓸하게 들려왔다. 그때, 맑은 도어벨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윤서 씨.”

고개를 들자, 가벼운 바람막이를 입은 태현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낚시 도구 가방과 작은 아이스박스가 들려 있었다. 태현은 윤서의 그늘진 얼굴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청호리 일기예보를 보니까, 밤하늘에 별이 아주 쏟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날 치과에 갇혀 있으면 반칙입니다. 나가요, 우리.”

“어디로요? 다리도 아직 조심하셔야 하잖아요.”

“다 나았습니다. 게다가 걷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갈 거라 걱정 안 해도 돼요. 청호리 주민만 아는 진짜 비밀 명소로 데려다줄게요.”

태현의 확신에 찬 눈빛에 윤서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태현의 다정한 목소리 한마디에 조금씩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포구로 내려가니 태현이 관리하는 작은 목조 어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단단해 보이는 배였다. 태현은 다친 다리를 조심하며 윤서가 안전하게 배에 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길이 닿자 차갑던 윤서의 손끝에 훈기가 돌았다.

“출발합니다. 꽉 잡으세요.”

탈탈거리는 가벼운 엔진 소리와 함께 배가 서서히 포구를 벗어났다. 바다로 나아갈수록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오직 배 앞머리의 서치라이트만이 밤바다를 밝혀주었다.

배가 포구에서 적당히 멀어져 한적한 연안에 멈추어 섰을 때, 태현은 엔진을 끄고 배 위의 조명을 하나둘 소등했다.

“와……”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윤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조명이 꺼지자마자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은하수가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처럼 거대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바다였다. 하늘의 별빛과 둥근 보름달이 잔잔한 파도 위에 그대로 내려앉아, 밤의 윤슬이 마치 은빛 보석 가루처럼 사방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달빛 윤슬이에요. 낮에 보는 은빛 윤슬도 예쁘지만, 밤에 배를 타고 나와서 보는 이 풍경은 정말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기분이 들게 하죠.”

태현은 아이스박스에서 따뜻한 보온병을 꺼내 컵에 코코아를 따라 윤서에게 건넸다. 달콤하고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정말 아름다워요, 태현 씨.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아요.”

“윤서 씨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있다면, 전부 이 깊은 바다에 던져버려요. 바다는 아무리 무거운 걸 던져도 다 받아주고 흔적도 남기지 않거든요.”

태현의 말에 윤서는 들고 있던 컵을 꼬옥 쥐었다. 별빛이 부서지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그녀는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을 때… 전 늘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살았어요. 부모님이 정해준 학교, 부모님이 고른 약혼자, 그들이 원하는 미래까지. 그 선을 벗어나면 제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줄 알았죠. 그런데 그 선이 제 목을 조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윤서의 눈가에 달빛을 닮은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여기에 내려와서 비로소 내 힘으로 숨을 쉬는 것 같았는데… 민우 씨가 다시 나타나니까, 자꾸만 그 차가운 선들이 저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 무서웠어요.”

태현은 조용히 윤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리는 밤바다 대신 오직 윤서의 모습만이 깊게 담겨 있었다. 태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밤바람에 흐트러진 윤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윤서 씨.”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감미롭게 울렸다.

“바다가 아름다운 건, 육지처럼 억지로 그어놓은 선이 없기 때문이에요. 누군가 선을 그으려 해도 파도가 치면 금세 지워져 버리죠.”

태현이 윤서의 젖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민우 씨나 서울의 일들이 아무리 차가운 선을 그으려 해도 걱정하지 마요. 내가 청호리의 파도가 되어서, 그 선들이 윤서 씨에게 닿지 못하게 전부 지워버릴 테니까.”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윤서의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다. 슬픔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눈앞의 남자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다가왔다.

태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밤하늘의 별빛을 가득 담은 채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밤바다 위에 흐르는 은빛 윤슬이, 마치 두 사람의 시작을 축복하듯 잔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어지는 8화 예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연애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마을 리조트에 머물던 민우가 치과의 건물주를 만나 뜻밖의 제안을 건네며, 윤서의 치과는 갑작스러운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