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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8화:폭풍 전야의 달콤함과 위기의 그림자

by AK98 2026. 7. 12.

밤바다에서의 고백 이후, 윤서의 세상은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이른 아침 치과 문을 열 때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짭조름한 바람마저 마치 태현의 다정한 숨결처럼 느껴졌다. 출근길에 마주친 청호리 바다는 유난히 더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원장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아침부터 콧노래를 다 부르시고.”

출근하자마자 차트를 정리하던 경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윤서는 짐짓 모르는 척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대답했다.

“날씨가 좋아서요, 경희 씨. 오늘 예약 환자 많죠? 얼른 준비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서의 주머니 속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징징 울려댔다.

[태현: 오늘 아침 바다가 윤서 씨 닮아서 아주 예쁩니다. 점심에 치과 뒤뜰로 잠깐 나올래요? 맛있는 샌드위치 싸갈게요.]

메시지를 읽는 윤서의 입꼬리가 저절로 승천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평화롭고 간지러운 연애의 시작이었다.

약속한 점심시간, 윤서는 아무도 모르게 치과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뒤뜰 낡은 평상에는 정말로 태현이 작은 바구니를 들고 앉아 있었다. 윤서를 발견한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서 와요, 이 원장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직 마을 사람들에겐 비밀이잖아요.”

윤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핑계 대듯 평상에 앉자, 태현이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크고 단단한 그의 손바닥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졌다.

“우리 사귀는 게 무슨 죄라고 비밀로 합니까? 그래도 윤서 씨가 원하면 당분간은 철저히 비밀 요원이 되어 드리는 수밖에요.”

태현은 직접 만든 감자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투박하지만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윤서의 입가를 태현이 엄지손가락으로 다정하게 훔쳐주었다. 그의 따뜻한 눈빛이 오롯이 자신에게 꽂힐 때마다 윤서는 청호리에 내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백 번도 넘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 진료가 한창이던 세 시경, 치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이 건물 1층에서 낚시 용품점을 운영하는 건물주 최 씨 할아버지였다. 평소라면 껄껄 웃으며 믹스커피나 한잔 얻어 마시러 오던 분이었는데, 오늘따라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어, 최 사장님. 어서 오세요. 어디 이가 불편하신가요?”

윤서가 반갑게 맞이했으나, 최 사장은 눈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아니, 저기… 이 원장. 참 미안하게 됐네.”

“네? 뭐가 미안하세요?”

최 사장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주머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접수대에 올려놓았다.

“내가 이 건물을 팔게 되었네. 갑자기 웬 서울에서 온 큰 부자가 나타나서… 시세의 세 배를 주겠다고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겠나. 우리 자식놈들이 서울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어서, 나로서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

윤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건물을… 파신다고요? 그럼 저희 임대차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게… 그 새 건물주 측에서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현대식 리조트 배후 시설을 짓겠다고 하더군. 당장 다음 달까지 비워달라고 하네. 위약금이랑 이사 비용은 섭섭하지 않게 얹어주겠다고 하니, 제발 좀 양해를 해주게나.”

새 건물주. 시세의 세 배. 리조트 배후 시설.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엉켜 돌던 순간, 윤서의 뇌리에 단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한민우?’

윤서는 급히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치과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을 해변 리조트로 향하는 길목, 역시나 그의 은색 세단이 서핑 숍 근처에 정박해 있었다. 민우는 차 문에 기댄 채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윤서를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혜윤. 얼굴 보기 힘드네.”

“한민우, 너 미쳤어? 우리 치과 건물 인수해서 허물겠다는 거, 정말 네 짓이야?”

민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미치다니. 합리적인 비즈니스지. 청호리 리조트 사업에 우리 회사 지분이 있는 건 알지? 마침 그 낡은 건물이 미관을 해쳐서 매입한 것뿐이야. 네가 서울로 올라오면 아무 문제 없을 일이고.”

민우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이기적이었다.

“여기서 그 푼돈 버는 시골 치과 의사 놀이는 이제 그만해. 네 부모님도 동의하셨어. 네가 스스로 안 올라오면, 사방을 막아서라도 올라오게 만들라고.”

“너 정말… 이렇게까지 비열한 사람이었어?”

윤서의 눈에서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이 고였다. 이제 겨우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했는데, 거대하고 차가운 돈과 권력의 힘이 그녀의 소중한 안식처를 단숨에 으스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울지 마. 다 널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려는 배려니까.”

민우가 윤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그때, 거칠게 민우의 손목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남의 여자 몸에 손대지 마시죠.”

태현이었다. 언제 왔는지 그의 눈빛은 거센 파도처럼 거칠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태현은 민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윤서를 제 품으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당신이 돈으로 무슨 짓을 꾸미든 상관없는데, 내 사람 울리는 건 내가 못 참아.”

태현의 나직하지만 무거운 경고가 청호리의 푸른 하늘 아래 팽팽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9화 예고] 건물이 팔려 치과를 잃을 위기에 처한 윤서. 좌절하는 그녀를 위해 태현은 청호리 청년회와 주민들을 소집하며 예상치 못한 반격을 준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