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뉴스에서는 연일 듣도 보도 못한 ‘외환위기’니 ‘IMF 지원 요청’이니 하는 단어가 흘러나왔고, 어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TV 속 앵커의 어두운 목소리가 거리에 깔릴 때마다, 사람들은 어깨를 더욱 좁힌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시흥고등학교 체육관 한구석, 태권도부 연습실의 공기만큼은 열기로 뜨거웠다.
‘쌕, 쌕-!’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붉은색 호구를 때리는 자비 없는 오른발 뒤후려차기가 공기를 갈랐다. 타격음이 체육관 천장을 울리자마자 샌드백을 잡고 있던 부원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현아! 제발 살살 좀 해! 타격 미트 찢어지겠다!”
“자세가 허술하니까 밀리지! 다시 잡아, 김은서!”
땀에 젖은 단발머리를 털어내며 아현이 도복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허리에는 때 묻은 검은 띠가 굳건히 매여 있었다. 윤아현에게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열여덟 아현의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언어이자,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였다. 남들은 체급에 비해 키가 작다느니, 여자부 선수가 적어 비전이 없다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아현은 상관없었다. 매트 위에 서서 상대의 눈을 노려볼 때 느껴지는 그 선명한 생동감이 좋았다.
그러나 그 생동감도 학교 교무실에서 들려온 한마디에 얼어붙고 말았다.
“태권도부 해체다.”
코치님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재단 이사장이 운영하던 중소기업이 부도가 났고, 학교 예산이 동나면서 당장 다음 달부터 비인기 종목 운동부 지원을 전면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코치님! 저희 전국체전이 겨우 세 달 남았어요! 여기서 그만두면 저희는 어디로 가요?” “미안하다, 아현아… 학교에서도 어쩔 수가 없단다. 세상이 지금 다 망해가고 있어.”
어른들은 늘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말로 아이들의 꿈을 쉽게 털어냈다. 하지만 아현은 인정할 수 없었다. 세상이 망하는 것과, 내가 오늘 흘린 땀방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날 밤, 아현은 답답한 마음에 도복을 가방에 쑤셔 넣고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왔다. 골목길 어귀, 주황색 공중전화 부스 옆에 새로 생긴 만화책 대여점 ‘청춘문화’의 아크릴 간판이 파르르 떨리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
딸랑-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쌉싸름한 종이 냄새와 함께 작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신승훈의 노래가 들려왔다. 카운터 안쪽, 쌓여있는 만화책 더미 뒤로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헐렁한 흰 셔츠에 이마를 덮은 더부룩한 머리. 빛을 잃은 눈동자로 영혼 없이 장부를 적어 내려가는 남자, 지호였다.
“저기요, 슬램덩크 신간 나왔어요?”
아현의 씩씩한 목소리에 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호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명문대 건축학과에서 과티를 입고 캠퍼스를 누비던 그였지만, 아버지가 야반도주하고 빨간 압류 딱지가 온집안에 붙은 이후 지호의 삶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매일 밤 사채업자들이 찾아와 대문을 발로 찼고, 어머니는 시골 외가로 피신했다. 지호에게 남은 건 하루 18시간의 혹독한 노동과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빚더미뿐이었다.
“슬램덩크… 아까 어떤 애가 빌려갔는데.”
지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아, 진짜요? 언제 들어와요? 저 그거 보려고 오늘 연습 끝나고 빛의 속도로 뛰어왔는데!”
아현이 아쉬운 듯 툴툴거리며 카운터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때 지호의 시선이 아현이 어깨에 멘 커다란 스포츠 가방으로 향했다. 가방 틈새로 삐져나온 땀에 젖은 태권도 띠와 매일유업 로고가 박힌 음료수 병이 보였다.
“태권도 해?” “네! 시흥고 태권도부 윤아현인데요. 들어봤죠? 저 다음 전국체전 금메달 후보예요.”
아현이 가슴을 쫙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지호는 허탈한 웃음을 슬그머니 흘렸다. 금메달 후보라니.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 편의점 유통기한 임박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자신과 달리, 이 소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불과 반년 전의 자신의 모습 같기도 했다.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꿈을 말하던 그 시절.
“근데 왜 표정이 그래? 금메달 후보 치고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데.” “아… 그게요. 오늘 우리 운동부가 해체된대요. IMF인가 뭔가 때문에.”
아현이 만화방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요. 자기들이 회사 망하게 해놓고 왜 우리 발차기를 못 하게 해요? 내가 운동하는 데 들어가는 돈, 내가 알바해서라도 벌면 될 거 아니에요!”
아현의 당돌하고 곧은 눈빛이 지호의 가슴을 쿵 때렸다. 지호는 요즘 만나는 모든 어른들에게서 절망과 포기, 절규만을 봐왔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매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자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소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오로지 자신의 발차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알바는 아무나 하는 줄 아냐. 고등학생은 쓰지도 않아.” “쓰게 만들어야죠! 저 체력은 끝내주거든요. 아저씨, 혹시 여기 알바 안 필요해요?” “나 아저씨 아니다. 스물둘이야.” “에이, 얼핏 보면 서른은 돼 보이는데. 아무튼 나 알바 시켜주면 만화책 정돈도 열 배는 빠르게 하고, 밤에 취객 들어오면 돌려차기로 쫓아내 줄게요!”
아현이 씩 웃으며 주먹을 지어 보였다. 그 무모하고도 맑은 웃음에, 지호는 아주 오랜만에 가슴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하는 1997년의 어두운 밤, 지호의 폐허 같은 일상 속으로 태양 같은 소녀가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지호는 장부책을 덮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신간 들어오면… 너한테 제일 먼저 연락 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 가라, 꼬맹아.”
“꼬맹이 아니거든요! 윤아현이라니까요!”
아현은 투덜대며 만화방 문을 열고 나갔지만, 돌아보며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또 올 거예요! 슬램덩크 꼭 빼놓으세요!”
유리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지호는 한동안 아현이 나간 문쪽을 바라보았다. 소녀가 남기고 간 단정한 땀 냄새와 푸른 청춘의 기운이 만화방 안에 아지랑이처럼 감돌고 있었다. 시대를 덮친 거대한 폭풍 속에서, 두 사람의 톱니바퀴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