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청호리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눈부셨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은빛 윤슬이 동해 바다 전체를 보석으로 뿌려놓은 듯 사방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날 청호리 백사장에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따뜻한 결혼식장이 차려졌다.
화려한 버진로드 대신 조개껍데기와 하얀 모래가 길을 이루었고, 고급 생화 장식 대신 마을 어르신들과 서핑 숍 회원들이 며칠 동안 정성스레 깎고 가꾼 들꽃 화분과 목조 아치가 백사장을 감쌌다. 단상 뒤로는 장엄하게 밀려드는 푸른 파도와 수평선이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치과 대기실에서 하얀 리넨 드레스를 입은 윤서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호흡을 내쉬었다. 화려하고 경직된 서울의 웨딩드레스 대신 선택한 깔끔하고 단아한 드레스는, 청호리의 자연스러운 바람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우리 딸, 정말 아름답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아버지 이찬영 원장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우아한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 송 여사 역시 눈시울을 붉히며 윤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아빠…"
"윤서야, 네가 직접 선택한 삶에서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부모 욕심으로 네 날개를 꺾으려 했던 것,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이렇게 예쁘게 서 줘서."
아버지는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윤서의 눈가에도 기쁨의 눈물이 고였다. 과거의 상처와 부모님과의 갈등이 완벽하게 승화되어 온전한 축복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오후 2시, 소박한 음악 소리와 함께 백사장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청년회 회원들, 그리고 윤서의 부모님이 좌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깔끔한 리넨 수트를 입은 신랑 태현이 늠름한 자태로 백사장을 걸어 들어왔다. 그의 맑고 단단한 눈동자는 오직 신부 대기실 쪽을 향해 있었다.
이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윤서의 모습에 하객석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우리 금손 원장님, 진짜 선녀가 따로 없네!" "맥가이버 태현이 놈, 계 탔다 계 탔어!"
어촌계장님과 박 씨 할머니의 정겨운 추임새에 하객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주례 없는 예식은 웃음과 감동 속에 진행되었다. 아버지 이 원장은 축사를 통해 태현의 손을 꼭 쥐며 "내 딸에게 가장 넓고 단단한 바다가 되어주어 고맙네. 자네를 내 참된 사위로 맞이하게 되어 기쁘네"라고 진심 어린 축복을 내렸다.
서로를 향해 반지 상자를 꺼낸 두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윤슬 은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태현이 윤서의 손을 감싸 쥐며, 하객들 앞에서 성혼 선서문을 나직하게 읽어 내려갔다.
"저 공태현은, 제 삶에 찾아온 가장 아름다운 빛 이윤서 씨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살면서 어떤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윤서 씨가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방파제가 되어줄 것을 약속합니다."
이어 윤서 역시 떨리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이윤서 역시, 상처받은 제 마음에 푸른 바다를 선물해 준 공태현 씨를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 태현 씨의 계절이 언제나 따뜻할 수 있도록, 가장 깊은 마음으로 곁을 지키겠습니다."
두 사람의 서약이 끝나자,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온 상쾌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과 드레스 자락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태현이 윤서의 베일을 걷어 올리고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추자, 청호리 포구 전체를 가득 채우는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무사 경희가 던져진 들꽃 부케를 받아 들며 기뻐했고, 마을 사람들은 준비해 온 시루떡과 음식을 나누며 잔치를 벌였다. 은빛 윤슬이 흩뿌려진 동해 바다는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빛으로 축복해 주었다.
1년 뒤.
청호리의 아침은 변함없이 푸르고 청량했다.
'청호리 구강 보건·복지 케어 센터'로 한층 더 넓어진 치과 진료실 안에서는 윤서가 마을 어르신의 이를 정성스럽게 살피며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박 사장님, 식사하시고 양치질 잘하고 계시죠? 이제 잇몸도 아주 튼튼해지셨네요."
"그럼! 우리 금손 원장님이 고쳐준 이인데, 내가 자식보다 더 아끼며 닦는다 안 하나!"
기분 좋은 진료가 이어지던 중, 딸랑하는 도어벨 소리와 함께 큼지막한 커피 트레이를 든 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헐렁한 셔츠 차림의 태현은 여전히 싱그럽고 건강한 에너지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 마누라님, 오전 진료 수고하셨습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배달 왔습니다."
"어머, 태현 씨! 어르신 계시는데 마누라님이 뭐예요."
윤서가 볼을 붉히며 핀잔을 주자, 박 씨 할머니는 "아이고, 1년이 지나도 여전히 꿀이 떨어지네!" 하며 껄껄 웃었다.
점심시간, 윤서와 태현은 나란히 치과 뒤뜰 평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도망치듯 내려왔던 윤서는 이제 이곳 청호리에서 진짜 자신의 이름을 찾았고, 자신만의 삶을 가꿔가는 훌륭한 의사이자 사랑받는 아내가 되어 있었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인생은 그 어떤 명예나 부보다 풍요롭고 행복했다.
태현이 가만히 윤서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윤서는 익숙하게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윤서 씨."
"네, 태현 씨."
"오늘 바다도 참 예쁘네요. 윤서 씨 처음 만난 날처럼."
"그날 태현 씨가 뚝딱거려 준 간판 덕분에 내 인생도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아요."
윤서의 다정한 말에 태현이 낮게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수평선 위로 무수한 은빛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서울의 어두운 길을 지나 청호리의 푸른 바다에서 만난 두 사람. 그들의 사랑은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저 영원한 윤슬처럼 매일매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에서 너를 만나 -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