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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제17화: 시간이 새긴 증거,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by AK98 2026. 5. 14.

다은의 고향 집은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 잡은 작은 한옥이었다. 마당 한구석에 핀 목련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서울의 소음 대신 정겨운 풀벌레 소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서준은 낯선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며 다은이 자라온 흔적을 눈에 담았다.

"여기가 제가 꿈을 키우던 곳이에요. 사장님을 모시기엔 너무 허름하죠?"

"아니요. 아주 따뜻한 곳이네요. 다은 씨가 왜 그런 다정한 디자인을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다은은 서둘러 안방 다락방을 뒤졌다. 먼지 쌓인 상자들 사이에서 낡은 비단보에 싸인 물건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그녀의 할머니가 평생을 기록해온 자수 일기장과 낡은 손수건들이었다.

"찾았어요! 여기 보세요, 서준 씨."

빛바랜 종이 위에는 다은이 '리-본' 프로젝트에서 선보였던 독특한 자수 문양들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날짜는 1980년대. 유채영이 주장한 해외 디자이너의 탄생보다 훨씬 앞선 기록이었다. 일기장 갈피에는 할머니의 서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버려진 조각보도 정성을 다해 이으면, 새 생명을 얻어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주는 법이다.'

서준은 그 문장을 읽으며 가슴 묵직한 전율을 느꼈다. 다은의 기획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대를 이어 내려온 사랑과 철학의 결정체였다.

"이게 바로 우리가 찾던 진짜 '리-본'의 뿌리입니다. 다은 씨, 고생 많았어요."

서준은 다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감동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사회 결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시간. 서준은 곧바로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보안팀이 확보한 유채영의 서버 조작 기록과 이 일기장의 사진을 대조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서울, JS 패션 이사회장. 유채영은 승리를 확신한 듯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강서진 전무가 의사봉을 두드리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군. 강서준 사장의 해임안과 이다은 씨의 징계 해고 건을 표결에 부치겠습니다."

이사들이 하나둘 손을 들려던 찰나,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먼 길을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는 서준과 다은이 나타났다.

"잠깐! 표결을 멈춰주십시오. 새로운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서준은 당당하게 단상 앞으로 걸어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펼쳐 보였다. 동시에 대형 스크린에는 보안팀이 복구한 유채영의 컴퓨터 로그 기록이 띄워졌다. 유채영이 해외 사이트의 게시물 날짜를 조작하기 위해 백엔드 서버에 접속한 시간과 경로가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채영 실장이 제시한 증거는 정교하게 조작된 거짓입니다. 여기 이 일기장이 '리-본'의 진짜 기원이며, 이다은 씨의 창의성은 누군가의 것을 훔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유산을 이어받은 고귀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회의실 안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이사들은 조작된 데이터와 40년 전의 일기장을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유채영의 안색은 종이처럼 하얗게 질렸다.

"이... 이건 모함이야! 그깟 낡은 공책이 무슨 증거가 된다고!"

"유 실장, 이미 우리 보안팀이 조작 프로그램을 사용한 당신의 개인 노트북까지 확보했습니다. 더 이상의 추태는 그만두시죠."

서준의 차가운 일갈에 유채영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강 회장은 아들의 당당한 모습과 다은의 진실한 눈빛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에게 다가왔다.

"내 아들이지만... 오늘 처음으로 네가 진짜 경영자처럼 보이는구나. 그리고 이다은 씨, 오해해서 미안하네. 자네의 그 마음, 우리 회사가 잘 간직하겠네."

해임안은 부결되었고, 유채영과 강서진 전무의 음모는 물거품이 되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다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짚었다. 서준은 그런 다은을 놓치지 않고 단단히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다 끝났어요. 다은 씨가 이겼습니다."

"아니요, 우리가 이겼어요. 서준 씨."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노을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핀 꽃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음 회 예고] '리-본' 라인의 정식 글로벌 런칭! 다은은 수석 디자이너로 파격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서준은 다은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런웨이 프로포즈'를 준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