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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2화:보이지 않는 장벽과 새로운 통로

by AK98 2026. 7. 20.

라이브 방송의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엄청났다.

용역들이 물러간 지 삼일 만에, 청호리 포구는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외지 환자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유튜브와 SNS를 타고 퍼진 ‘꽃과 바다의 방어전’ 영상이 대기업의 갑질에 맞선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승리로 포장되어 큰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원장님! 오전 예약 환자분들 진료 다 끝났는데, 대기실에 접수 없이 오신 분들이 대여섯 분이나 더 계세요. 서울에서 일부러 치과 보러 오셨대요!”

조무사 경희가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며 차트를 흔들었다. 윤서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싱긋 웃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경희 씨. 조금만 더 힘내요. 기다리시는 분들 지루하지 않게 따뜻한 차라도 한 잔씩 대접해 드리고요.”

진료실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청호리 앞바다는 평소보다 한층 더 반짝이고 있었다. 바쁘고 고된 와중에도 마음만큼은 서울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잠시 숨을 돌리려던 찰나, 진료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태현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그가 직접 내린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우리 예쁜 원장님, 오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네.”

태현이 다정한 눈빛으로 윤서에게 커피 잔을 건넸다. 윤서는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어깨에 뭉쳐 있던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태현 씨 덕분이죠. 그날 라이브 방송 아니었으면 저 정말 서울로 끌려갔을지도 몰라요.”

“무슨 소립니까. 윤서 씨가 용기 있게 앞장서 주셨으니 주민들도 움직인 거죠.”

태현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윤서의 콧날에 묻은 가벼운 먼지를 털어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대기실의 시끄러운 소음은 아득히 멀어지고,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나누는 찰나의 눈맞춤은 두 사람에게 가장 달콤한 휴식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후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치과의 주요 약품과 의료 소모품을 납품하는 중형 제약회사의 영업 대리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들어가기로 했던 마취제하고 임플란트 식립용 고정체, 그리고 레진 재료들 배송이 전면 보류되었습니다.”

윤서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류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당장 내일 예약 환자분들 마취제부터가 부족한 상황인데요.”

“그게… 본사 위선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 원장님 댁의 대형 치과 네트워크 아시잖습니까. 그쪽에서 저희 본사 유통망 쪽에 압력을 넣은 모양입니다. 개인 시골 치과 한 군데 납품을 계속할 경우, 그쪽 네트워크 산하 전국 50여 개 지점과의 모든 거래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네요. 저희 같은 하청 업체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한민우, 그리고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

무력이나 법으로 해결되지 않자, 의사로서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비열한 음모였다. 치과 재료, 특히 마취제나 고난도 수술용 재료들은 일반적인 유통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구하기가 대단히 까다로웠다. 이대로 재료가 바닥나면 당장 다음 주부터는 아무리 환자가 몰려와도 정상적인 진료를 할 수 없게 된다.

윤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마침 진료실 정리를 돕던 태현이 그녀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다가왔다.

“윤서 씨,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윤서는 결국 참았던 속상함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털어놓았다.

“민우 씨와 우리 부모님이… 치과 재료 공급을 다 막아버렸대요. 마취제도, 소독 용품도 이제 공급받을 수가 없어요. 서울에 있는 대형 유통망을 다 쥐고 흔들 수 있는 분들이니까요.”

윤서의 눈에 억울함의 눈물이 고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그 거대한 성벽을 제가 뛰어넘을 수는 없는 걸까요? 청호리에서 겨우 찾은 제 행복인데…”

태현은 깊은 한숨 대신, 가만히 윤서의 떨리는 두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품은 넓고 따뜻했으며, 언제나처럼 든든한 바다 향이 났다.

“윤서 씨, 걱정 마요. 대기업이나 대형 병원이 세상의 모든 유통망을 다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거대한 고속도로를 막았다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을 찾으면 됩니다.”

태현의 눈빛이 예의 그 단단하고 깊은 빛으로 반짝였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알던 선배 중에, 대형 유통 대기업의 횡포에 반대해서 친환경 의료 기자재 및 독립 의약품 유통 협동조합을 만든 형이 있어요. 대형 네트워크의 압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오직 독립 병원들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아주 단단한 조직이죠. 제가 지금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태현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화를 하는 태현의 목소리는 신뢰감 있고 듬직했다. 윤서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청호리에 내려와 가장 잘한 선택은 다름 아닌 이 남자를 만난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금 굳혔다.

“윤서 씨, 해결책이 보입니다.”

태현이 통화를 끝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 당장 인근 광역시에 있는 그 협동조합 물류 창고로 직접 가기로 했습니다. 필요한 재료들을 그쪽에서 긴급 지원해 주겠대요. 내일 오전 진료 비워두고, 저랑 같이 드라이브 겸 다녀오시죠.”

태현의 든든한 해결책에 윤서의 마음에 다시금 따뜻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앞을 막아설 때마다, 태현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청호리의 가장 아름다운 방파제였다.

 

[이어지는 13화 예고] 의료 재료를 구하기 위해 태현과 함께 왕복 4시간 거리의 광역시로 특별한 출장 데이트를 떠나는 윤서. 한편, 서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민우는 공급 차단마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최후의 카드로 윤서의 치과 의사 면허 자체를 흔들기 위한 비열한 조작 음모를 준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