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3화:찬란한 출장 데이트와 다가오는 먹구름

by AK98 2026. 7. 22.

이른 아침의 청호리 포구는 짙푸른 새벽빛과 붉은 아침 해가 뒤섞여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전 진료를 비워둔 윤서는 가벼운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치과 앞마당으로 내려왔다. 이미 태현은 잘 닦인 그의 소형 SUV 시동을 걸어둔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태현은 윤서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이 원장님. 출장이 아니라 소풍 가는 기분인데요?”

태현의 다정한 너스레에 윤서의 뺨이 아침 노을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놀리지 말아요, 태현 씨. 긴급하게 재료 구하러 가는 길인데 마음이 아주 타들어 간다고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제 선배가 아주 확실한 분이니까요. 자, 출발합니다!”

차가 청호리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창밖으로 탁 트인 동해 바다의 절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하고 달콤한 인디 음악이 흘러나왔고, 차 안에는 태현이 보온병에 담아온 헤이즐넛 커피 향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위기 속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서울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만끽하는 완벽한 둘만의 아침이었다.

“윤서 씨, 서울에 있을 때는 주말에 보통 뭐 했어요?”

운전대를 잡은 태현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윤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말에도 쉬어본 기억이 별로 없네요. 부모님이 주최하시는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민우 씨와 격식 차린 레스토랑에서 양가 비즈니스에 도움 되는 사람들과 식사하는 게 전부였어요. 늘 숨이 막혔죠.”

윤서의 쓸쓸한 고백에 태현은 가만히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의 크고 거친 손바닥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윤서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이제 그런 격식은 청호리 앞바다에 다 던져버려요. 앞으로는 저랑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바다에 발도 담그고,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한 주말을 보내면 됩니다.”

태현의 단단한 약속에 윤서는 그의 손을 마주 꽉 잡으며 생긋 웃어 보였다.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인근 광역시의 협동조합 물류 창고는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활기찬 곳이었다.

“어이, 공태현! 진짜 오랜만이다!”

태현을 발견한 3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이 반갑게 달려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현의 대학 선배이자 독립 의약품 유통 협동조합의 이사장인 현준이었다. 현준은 윤서를 보자마자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 원장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태현이가 전화를 해서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더라고요. 청호리에 아주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서요.”

현준의 짓궂은 폭로에 태현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댔고, 윤서 역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현준은 미리 패킹해 둔 의료 상자들을 보여주었다. 마취제부터 레진, 임플란트 소모품까지 윤서에게 당장 필요했던 최고급 사양의 재료들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대기업 유통망보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저희는 거대 자본의 횡포에 맞서 개원의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한 사장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희 독립 조합까지 손댈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정기 납품 계약도 바로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현준의 든든한 지원에 윤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에이, 은혜는 저 녀석한테 갚으세요. 태현이가 원장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네요.”

돌아오는 길, 트렁크를 가득 채운 약품들 덕분에 윤서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했다.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장벽이 앞을 막아설 때마다, 태현은 마법처럼 새로운 길을 뚫어주었다. 그가 곁에 있는 한 그 어떤 폭풍우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최고급 빌딩의 민우 사무실.

비서로부터 청호리 치과의 약품 공급 차단 공작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민우는 분노로 가득 차 서류첩을 책상 위로 내팽개쳤다.

“독립 협동조합? 시골 서핑 강사 놈이 그런 유통망까지 손을 쓰고 있었다고?”

민우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이를 갈았다. 혜윤(윤서)을 힘으로 완전히 굴복시켜 제 발로 서울로 기어 들어오게 만들려던 그의 모든 계획이 번번이 그 시골 장사꾼 놈 때문에 무산되고 있었다.

초조함과 굴욕감이 극에 달한 민우는 수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김 변호사. 준비하라고 했던 거, 지금 바로 진행해.”

수화기 건너편에서 비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사장님, 정말 이 카드를 쓰시게요? 자칫하면 이혜윤 원장의 치과 의사 면허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만.”

민우의 눈빛이 차갑고 섬뜩하게 번뜩였다.

“상관없어. 의사 노릇을 영영 못 하게 되더라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만들면 돼. 서울에 있을 때 진행했던 대형 수술 부작용 건으로 허위 제보를 넣고, 의료 사고 조작 신청서 접수해. 청호리 보건소하고 협회 측에도 직접 로비 넣고. 당장 다음 주에 면허 정지 예고 통지서가 날아가게 만들어.”

민우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의 회색빛 빌딩숲을 내려다보았다.

“날개가 꺾여야 결국 둥지로 돌아오는 법이니까.”

 

[이어지는 14화 예고] 출장 데이트의 달콤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보건소 소속 공무원들과 협회 조사관들이 청호리 치과로 들이닥칩니다! 과거 서울 병원 시절의 조작된 '의료 사고' 혐의로 윤서의 치과 의사 면허가 정지될 위기에 처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