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물류 창고에서 실어 온 약품과 의료 소모품을 치과 선반에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자, 진료실 안에는 든든한 온기가 가득 채워졌다.
"윤서 씨, 오늘은 출발이 아주 좋습니다. 선배 조합 덕분에 한숨 돌렸네요."
태현이 커피잔을 들고 활짝 웃었다. 윤서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의사 가운을 걸쳐 입었다. 바다가 준 선물 같은 이 작고 따뜻한 공간에서, 제 힘으로 환자를 고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윤서가 그토록 바랐던 진짜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채 세 시간을 가지 못했다.
오전 진료가 한창이던 11시경, 칙칙한 정장 차림의 남성 네 명이 굳은 표정으로 치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분증을 꺼내 보인 이들은 관할 보건소 의약과 공무원들과 대한치과의사협회 윤리위원회 소속 조사관들이었다.
"이윤서 원장님 계십니까. 보건소에서 나왔습니다."
갑작스러운 공무원들의 등장에 대기실에 있던 환자들과 경희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윤서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진료실에서 나왔다.
"네, 제가 이윤서입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조사관 중 한 명이 묵직한 서류 봉투에서 문서를 꺼내 윤서에게 내밀었다.
"이 원장님이 서울 강남 모 병원에 재직할 당시 집도했던 대형 임플란트 및 뼈 이식 수술과 관련하여, 심각한 부작용 발생 및 환자 방치, 그리고 진료기록부 허위 작성 혐의로 정식 민원과 수사 의뢰가 접수되었습니다. 보건복지부 행정처분 절차에 따라, 사실 관계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치과의사 면허 정지 예고 및 현장 진료 중단 명령]을 통보합니다."
"네? 면허 정지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윤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저는 서울에서 수술할 때 단 한 번도 부작용을 방치하거나 차트를 조작한 적이 없습니다! 수술 결과도 완벽했고 환자분도 경과 관찰 후 만족해하며 퇴원하셨어요!"
"저희도 서류상으로 접수된 수술 동의서와 부작용 재수술 진단서, 그리고 피해 환자의 고소장을 토대로 집행하는 겁니다. 당장 오늘부터 진료를 중단하시고, 치과 내 관련 진료기록부와 컴퓨터 데이터 백업본을 제출해 주십시오."
조사관들은 냉정하게 차트를 수거하려 들었다. 의사로서의 명예와 존재 가치를 통째로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윤서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한민우… 결국 내 의사 자격까지 빼앗겠다는 거구나.'
윤서의 눈에서 참았던 억울함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건물을 사들이고 약품을 막는 것도 모자라, 의사로서의 존재 자체를 매장시키려는 비열한 수작이었다.
바로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태현이 상황을 파악하고 단숨에 윤서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요! 지금 뭐 하시는 깁니까?"
태현이 조사관의 손을 차단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정식 조사 절차를 밟는 공무원입니다. 업무 방해하지 마십시오."
"조사 절차요? 피의자 소명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확정 판결도 안 난 제보서류 한 장으로 시골 치과 진료부터 다짜고싸 중단시키는 게 올바른 절차입니까?"
태현은 서류 봉투를 뺏어 들고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그의 예리한 눈빛이 문서 하단의 제보자 명의와 법률대리인 이름을 포착했다.
'법무법인 한성 - 김창수 변호사.'
한민우의 개인 법률 대리인이자 한성그룹 산하 로펌이었다. 태현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흘렀다.
"역시나 그 양반 짓이군."
태현은 떨고 있는 윤서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그의 손길은 더없이 따뜻하고 단단했다.
"윤서 씨, 나 봐요."
윤서가 눈물 괸 눈으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윤서 씨가 어떤 의사인지, 서울에서 얼마나 정직하게 환자를 대했는지 내가 알고, 여기 청호리 주민들이 다 압니다. 저들이 아무리 조작된 서류로 윤서 씨 가운을 벗기려 해도, 진실은 절대 안 가려집니다. 내가 다 밝혀낼 테니까 날 믿어요."
태현의 굳건한 신뢰에 윤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는 조사관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운 옷깃을 여몄다.
"좋습니다. 조사에 협조하겠습니다. 하지만 조작된 혐의라는 것을 반드시 법적으로 증명해 낼 테니, 그쪽에서도 조사 과정에서 단 한 치의 편파성도 없어야 할 겁니다."
조사관들은 윤서와 태현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수거한 차트를 챙겨 서둘러 치과를 나갔다.
치과에 일시적 영업 정지 딱지가 붙고 정적이 찾아왔지만,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서울에 있는 대학 동문 법의학 교수와 인맥을 동원해 과거 윤서가 수술했던 환자의 진짜 차트 원본과 CCTV 기록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소식을 들은 청호리 주민들이 치과 앞으로 모여들었다. 박 씨 할머니는 윤서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어떤 놈이 우리 금손 원장님을 모함한단 말이고! 천벌을 받을 놈들!"
어촌계장과 청년회원들도 주먹을 쥐었다.
"원장님, 걱정 마이소! 우리가 보건소고 협회고 찾아가서 진정서 써내고 시위할 테니까!"
마을 사람들의 뜨거운 위로와 태현의 단단한 보살핌 속에서, 윤서는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민우가 아무리 거대한 돈과 권력으로 날개를 꺾으려 해도, 청호리의 따뜻한 바람과 태현이라는 단단한 방파제가 있는 한 그녀는 다시 피어오를 것이었다.
태현이 밤바다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한민우 씨, 선을 넘어도 너무 깊이 넘어왔어. 이제 내가 당신 그 오만한 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똑똑히 보시지."
태현의 눈동자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거센 푸른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어지는 15화 예고] 윤서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직접 서울로 올라가 반격을 준비하는 태현! 한편, 한민우의 비리를 쥐고 있던 뜻밖의 조력자가 태현 앞에 나타나며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