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우 상무의 구속 수사 소식과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들의 검찰 조사 기사는 서울 재계와 의료계를 뒤흔들었다. 자신들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사윗감의 추악한 실체와, 딸 혜윤(윤서)이 강남 병원에서 쫓겨나듯 그만둬야 했던 진짜 이유가 밝혀지자 윤서의 부모님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청호리 치과 앞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지난번처럼 요란한 위세나 성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차에서 내린 윤서의 아버지 이찬영 원장과 어머니 송혜숙 여사는 곧장 치과로 들어서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서 진료실 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유리창 넘어 보이는 딸 윤서의 모습은 서울에 있을 때와 완벽히 달랐다. 화려하지만 피곤함이 가득했던 얼굴 대신, 환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얼굴에는 생기와 진정한 행복이 차올라 있었다. 박 씨 할머니가 건네는 찐 감자를 받아 들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윤서를 보며, 송 여사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보… 우리가 그동안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준 게 맞을까요? 혜윤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아요."
이 원장은 말없이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명목하에 부모의 욕심대로 그어놓았던 선이 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치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엄마, 아빠…?"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방문에 윤서가 놀라 일어서자, 뒤편에서 차를 준비하던 태현도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어머님."
이 원장은 이전과 달리 부드럽지만 묵직한 눈빛으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공 선생?"
네 사람은 치과 뒤뜰의 고요한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현이 차분한 손길로 우려낸 따뜻한 우엉차 향이 선선한 바닷바람을 타고 감돌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버지 이 원장이었다.
"민우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다, 혜윤아. 아니, 윤서야."
아버지가 처음으로 서울의 본명 대신 이곳에서의 이름 '윤서'를 불러주자, 윤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네 인생을 통제하려 했고, 네 진심을 알아주지 못했어. 서울에서의 억울한 일도, 민우의 비열함도… 우리가 눈을 가리고 있었더구나."
이 원장은 고개를 숙이며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평생 엄격하고 거대한 산 같았던 아버지의 사과에 윤서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빠… 저 도망친 거 아니에요. 여기서 저만의 삶을 열심히 가꾸고 있었어요."
"그래, 안다. 오늘 네 얼굴을 보니 확실히 알겠더구나. 넌 이미 훌륭하고 자립적인 의사다."
이 원장은 이어 맞은편에 정좌하고 앉은 태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 선생."
"네, 아버님."
"자네가 서울까지 가서 증거를 모으고 윤서를 구했다는 이야기 들었네. 시골에서 서핑이나 타는 청년인 줄 알았더니, 보통 배짱과 능력이 아니더군."
태현은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윤서 씨가 워낙 정직하고 완벽하게 살아왔기에 진실이 밝혀진 것뿐입니다. 저는 그저 윤서 씨가 상처받지 않도록 곁을 지켰을 뿐입니다."
"자네, 앞으로 우리 윤서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나? 자네의 삶과 윤서의 삶이 치우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버지는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로서의 마지막 확인이었다. 태현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깊고 단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는 윤서 씨를 제 울타리에 가두려 하지 않을 겁니다. 윤서 씨가 청호리에서 계속 환자를 돌보든, 혹은 먼 훗날 다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든, 저는 윤서 씨가 자유롭게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가장 넓은 바다가 되어줄 겁니다. 제가 윤서 씨를 사랑하는 건, 윤서 씨라는 존재 그 자체니까요."
태현의 진정성 어린 대답에 평상 위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 찼다. 송 여사는 태현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요, 공 선생… 우리 딸을 이렇게 깊이 아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 원장 역시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윤서야, 주말에는 태현 군과 함께 서울 집에 한번 들르거라. 엄마가 맛있는 밥 해놓고 기다리마."
마침내 거대한 오해와 갈등의 사슬이 완벽하게 풀어진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차량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서는 태현의 품에 안겨 마음껏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태현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푸른 청호리 바다를 함께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가로막던 세상의 모든 장벽은 허물어졌고, 이제 두 사람 앞에는 함께 걸어갈 찬란한 축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18화 예고] 부모님의 승낙으로 한층 더 깊어진 두 사람! 청호리에서는 여름맞이 마을 해변 축제와 서핑 대회가 열리고, 태현은 윤서를 위해 아주 특별하고 낭만적인 이벤트를 준비하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