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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4화:파도가 삼킨 순간, 그리고 너 태현과 노을빛 바다를 보며 깊은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청호리의 날씨는 눈이 시릴 정도로 맑았다.박 씨 할머니의 ‘금손’ 소문 덕분인지 치과에는 아침부터 환자들의 발길이 제법 이어졌다. 스케일링을 하러 온 젊은 어부, 틀니 조정을 원하는 할아버지까지 치료하는 동안 윤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몸은 고되었지만, 서울에서 느꼈던 기계적인 피로와는 결이 달랐다. 환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일은 윤서의 텅 비어 있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 창밖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던 윤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날씨는 맑았는데, 먼바다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해안가로 밀려드는 파도가 오전보다 훨씬 거세.. 2026. 7. 1.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3화:금손 원장님과 노을빛 서핑 숍 "아이고, 의사 선생. 내 평생 이 뽑는 기계 앞에서는 멧돼지 만났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뛴다 안 카나. 살살 해 주이소, 살살…"진료 의자에 누운 박 씨 할머니의 두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하루에만 수십 명의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긴장감이 윤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곳에서의 첫 진료이자, 청호리 주민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윤서는 깊고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차갑게 굳은 손목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마취할 때 조금 뻐근하고 나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 제가 아주 천천히,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저 믿으시죠?"윤서의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고 다정했다.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 2026. 6. 29.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2화:은빛 조개껍데기와 첫 번째 환자 '바른 바다 치과의원'의 공식적인 개원 첫날 아침이 밝았다.윤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의사 가운을 입었다. 서울의 대형 치과에서 근무할 때는 매일 아침 숨 막히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기계적으로 환자 차트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곳 청호리에서의 아침은 완전히 달랐다. 창문만 열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동해 바다가 싱그러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고, 파도 소리가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후우, 할 수 있어. 이혜윤.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윤서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울을 떠나올 때 느꼈던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과 실연의 상처는 바다 안개 속으로 조금씩 흩어지는 듯했다.오전 10시. 드디어 치과의 자동문 스위치.. 2026. 6. 27.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1화:파도 소리와 은빛 간판 서울의 하늘은 늘 회색빛 빌딩숲에 가려 숨이 막혔다. 강남의 한 대형 치과에서 페이닥터로 일하던 윤서에게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은 폭풍우와도 같았다. 3년을 만났고, 당연히 미래를 함께할 줄 알았던 전 남자친구와의 결혼은 집안의 격차와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라는 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깨져버렸다.“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집안에 들어가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어머니의 날카로운 음성과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던 전 남자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부모님이 정해준 안락한 궤도에서 단 한 번도 이탈한 적 없던 모범생 윤서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반항심이 싹텄다.‘내가 원하는 삶은 내가 결정해.’윤서는 사표를 던졌고, 모아둔 예금과 대출을 끌어모아 연고도 없는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 ‘청호리.. 2026. 6. 25.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최종화: 우리들의 가장 눈부신 런웨이 5월의 서울은 1년 전 그날처럼 유난히도 맑고 푸르렀다. 남산타워 위로 펼쳐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가로수들의 초록빛 잎사귀들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JS 패션 강서준 사장과 이다은 디렉터의 결혼식 당일. 모두가 최고급 호텔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러질 거라 예상했던 결혼식은, 뜻밖에도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 곳이자 '리-본(Re-Born)' 프로젝트의 고향인 '창신동의 오래된 한옥 마당'에서 열렸다."다은 씨,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내가 본 신부 중에 최고야!"마케팅팀의 지수 과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눈물을 훔쳤다. 다은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화려한 수입 브랜드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유품이었던 손수건.. 2026. 6. 22.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제19화: 결혼 준비는 프로젝트보다 어렵다?! "네! 좋아요, 서준 씨. 당신과 함께라면 평생 어떤 런웨이라도 걸을게요."다은의 눈물 섞인 대답과 함께 파티장에는 축포가 터졌고, 전 세계 패션계 인사들의 뜨거운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서준은 다은의 손가락에 목련 반지를 끼워주며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겠노라 다짐했다.하지만 감동적인 프로포즈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두 사람 앞에는 '결혼 준비'라는 인생 최대의 난공불락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다."서준아, 예식장은 당연히 가문의 전통대로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해야지. 하객만 최소 천 명은 올 텐데." 큰형 서진은 경영권 다툼에서 밀려난 뒤, 어떻게든 동생의 결혼식을 화려하게 꾸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 했다.반면 다은의 생각은 달랐다. "서준 씨, 저는 화려한 호텔보다 우리가 처음.. 2026.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