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샘플실의 높은 창을 통해 쏟아졌다. 밤새 스탠드 불빛 아래 씨름하던 다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자신의 어깨에 덮인 서준의 코트가 묵직하고 따뜻했다. 옆을 보니 서준은 벌써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완성된 자켓을 검토하고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조금 더 자도 되는데."
서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잠겨 있어 묘하게 섹시했다. 다은은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서둘러 옷을 정리했다. 그때,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문이 거칠게 열리고, 화려한 레드 수트를 입은 여자가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JS 패션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서준과 뉴욕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유채영'이었다. 그녀는 서준의 집안에서도 눈여겨보는 유력한 신붓감 후보이기도 했다.
"서준아, 여기서 밤을 새운 거야? 비서실에서 한참 찾았잖아."
채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은에게 향했다. 다은의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셔츠, 그리고 서준의 코트까지. 채영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이분은... 아, 게시판에서 봤던 그 '라떼 신입'인가 보네?"
"인사가 늦었군. 유채영 실장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디자인 감수를 맡았지."
서준이 무심하게 채영을 소개했다. 채영은 다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작업대 위에 놓인 '리-본' 자켓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자켓의 소매를 슥 훑더니 코방귀를 뀌었다.
"이게 메인 샘플이야? 박음질이 들쭉날쭉하잖아. 서준아, 네가 말한 '진정성'이라는 게 고작 이런 아마추어 같은 손바느질이었어? 이건 럭셔리가 아니라 그냥 구제 옷이야."
채영의 독설에 다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새 정성을 다해 기운 매듭들이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유 실장, 이건 기계로 구현할 수 없는 디테일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어. 오히려 이 투박함이 우리 브랜드가 지향하는 '스토리'를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서준이 차분하게 반박했지만, 채영은 멈추지 않았다.
"스토리도 실력이 뒷받침될 때나 먹히는 거야. 이런 옷을 런웨이에 올리면 JS 패션의 격이 떨어져. 서준아,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 섞지 마. 네가 이 신입사원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시장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어."
채영은 다은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서준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아버지께서도 이번 프로젝트 기대가 크셔. 실수하지 마."
채영이 나간 후, 샘플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다은은 자신이 만든 옷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수석 디자이너의 눈에 '구제 옷'으로 보였다면, 정말 실패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다은 씨."
서준이 다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은의 떨리는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유 실장은 완벽주의자라 말이 좀 거칠어요. 하지만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합니까? 나는 이 옷에서 당신의 밤을 봤고, 우리 브랜드가 잃어버렸던 온기를 봤습니다. 남의 눈에 완벽한 옷보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옷을 만드세요. 그게 내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니까."
서준의 단단한 격려에 다은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다은을 믿고 있었다. 다은은 코끝이 찡해졌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네, 사장님. 저... 포기 안 해요. 유 실장님 말씀대로 '아마추어' 소리 듣지 않게, 남은 시간 동안 완벽하게 보완하겠습니다."
다은은 다시 바늘을 들었다. 서준의 말대로, 이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진심'이었다. 서울의 아침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다은의 진짜 싸움도 이제부터였다.
한편, 복도 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채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응, 오빠. 계획대로 진행해. 그 신입사원, 스스로 나가게 만들어야지."
[다음 회 예고] 본격적인 런칭 이벤트 준비! 하지만 다은에게 주어진 원단이 통째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누구일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다은과 서준은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기적을 찾아 헤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