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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너의 발차기가 하늘에 닿을 때-제2화:새벽의 바람, 그리고 새벽 4시의 재회

by AK98 2026. 8. 14.

1997년의 밤은 너무 길었고, 아침은 지나치게 서둘러 찾아왔다.

학교 태권도부 해체 통보가 떨어진 다음 날, 아현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눈을 떴다. 부원들이 모두 절망에 빠져 연습실에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현은 도복을 챙겨 입고 운동화 끈을 꽉 동여맸다.

‘부원이 없으면 나 혼자라도 뛰면 돼. 코치님이 없으면 혼자 샌드백을 차면 되고.’

아현은 시흥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맑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이 IMF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아현이 발을 디디고 있는 땅만큼은 견고해야 했다.

그 시각, 지호는 새벽 4시의 눅눅한 공기를 맞으며 스쿠터에 올라타고 있었다.

만화방 야간 알바가 끝나는 시간은 새벽 3시 반. 하지만 지호의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침 6시까지 동네 입구로 배달되는 신문 200 부를 돌려야 했다. 부도난 아버지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지방으로 내려간 어머니의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지호는 잠을 줄이는 법을 먼저 배웠다.

‘ 착-!’

지호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접힌 신문을 대문 안쪽으로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신문이 마당에 떨어졌다. 신문 1면에는 어김없이 헤드라인으로 ‘기업 연속 부도’, ‘감원 바람’ 같은 어두운 단어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지호는 그 글자들을 외면하듯 눈을 감고 다시 스쿠터 가속기를 당겼다.

그때였다. 가파른 언덕길 모퉁이를 돌던 지호의 눈에 붉은색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하앗! 헛!’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가파른 계단을 번개 같은 속도로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고,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절도 있는 호흡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어…?”

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스쿠터를 멈춰 세웠다. 어제 만화방에서 씩씩하게 “슬램덩크 나왔냐”고 물었던 그 꼬맹이, 윤아현이었다.

아현은 계단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거친 숨을 내쉬며 허벅지를 짚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 올리는 오른발 돌려차기.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정막을 깨뜨렸다.

“거기서 뭐 하냐?”

지호의 목소리에 아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신문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스쿠터 위에 앉아 있는 지호를 발견한 아현의 눈이 동그라돤다.

“어? 만화방 아저씨… 아니, 오빠?” “내가 아저씨 아니랬지.” “새벽에 여기서 뭐 해요? 설마 나 운동하는 거 감시하러 왔어요?” “착각도 유분수다. 보면 몰라? 신문 돌리는 중이잖아.”

지호가 어깨에 멘 묵직한 신문 가방을 툭툭 쳤다. 아현은 그제야 지호의 핼쑥한 얼굴과 붉게 충혈된 눈을 알아챘다. 어제 만화방에서도 피곤해 보였지만, 새벽 빛 아래서 본 지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우와… 밤에는 만화방 알바 하고, 새벽에는 신문 돌려요? 언제 잠은 자고요?” “잘 시간 없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비켜.”

지호가 다시 스쿠터 시동을 걸려 하자, 아현이 잽싸게 달려와 스쿠터 앞바퀴를 막아서며 말했다.

“오빠, 신문 배달 몇 개 남았어요?” “왜 묻는데.” “내가 도와줄게요! 저 운동 겸 뛰면서 돌리면 금방 끝나요!” “됐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가서 공부나….”

“아 진짜! 나 발 빠르다니까요?”

아현은 지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스쿠터 뒷자리에 매달린 신문 뭉치에서 50부쯤을 덥석 집어 들었다.

“어디 어디 돌리면 돼요? 이 골목이죠? 나 체력 남아서 주체 못 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아현은 지호가 말릴 새도 없이 쏜살같이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담장 너머로 신문이 차곡차곡 던져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지호는 황당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섭도록 어둡고 짓눌린 자신의 삶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뛰어든 엉뚱한 아이.

30분 뒤, 두 사람은 언덕 끝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호가 자판기에서 뽑은 따뜻한 캔커피 두 개 중 하나를 아현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덕분에 일찍 끝났네.” “에이, 이 정도 가지고요. 운동 제대로 됐는데요 뭐.”

아현은 따뜻한 캔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배시시 웃었다. 캔커피의 온기가 차가워진 손가락 마디마디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아현아.” “네?” “태권도부 해체된다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운동해? 어차피 대회도 못 나갈지도 모르는데.”

지호의 건조한 질문에 아현은 잠시 커피 캔을 내려다보았다. 지호는 자신이 또 소녀의 상처를 건드렸나 싶어 입술을 다물었지만, 아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아주 잠깐이었다. 아현은 고개를 번쩍 들고 지호를 곧게 바라보았다.

“대회에 나가든 못 나가든, 내가 태권도를 좋아하는 건 안 변하니까요.” “……” “세상이 망했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까지 버릴 수는 없잖아요. 학교에서 안 시켜주면, 혼자서라도 연습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올 거 아니에요?”

아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지호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불과 몇 달 전, 아버지가 부도를 내고 가족들이 산산조각 났을 때, 지호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 건축학과에 휴학계를 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던 설계도면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더 이상 꿈을 꾸는 것은 사치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무너져 내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내고 있었다.

“오빠는요?” “어?” “오빠는 꿈이 뭐였어요? 왜 그렇게 잠도 안 자고 피곤하게 살아요?”

아현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 나는… 건물을 짓고 싶었어. 사람들이 따뜻하게 쉴 수 있는 집.” “우와, 건축가요? 멋지다!” “근데 이젠 안 해. 아니, 못 해. 세상이 이 모양인데 무슨 집을 지어. 당장 내일 살 집도 없는데.”

지호의 자조 섞인 말에 아현은 가만히 지호의 손을 바라보았다. 신문 인쇄 먹이 까맣게 묻어있는 지호의 긴 손가락. 아현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밴드 하나를 꺼내 지호의 손등에 붙여주었다. 새벽 배달을 하다가 긁힌 듯 살점이 살짝 파여 있던 곳이었다.

“못 하긴 왜 못 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다시 하면 되지.” “꼬맹이 눈에는 세상이 참 쉬워 보이지?” “쉬워서가 아니라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우리 관장님이 그랬거든요. 태권도에서는 판정패당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경기가 끝난 게 아니라고.”

아현이 씩 웃으며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오빠도 아직 판정패 안 당했잖아요. 그러니까 벌써 포기하지 마요. 내가 응원해 줄 테니까.”

떠오르는 아침 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붉은 빛을 내리쬐기 시작했다. 지호는 손등에 붙은 아기자기한 캐릭터 밴드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이상하게도, 매일 아침 자신을 짓누르던 거대한 절망의 무게가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신문 다 돌렸으니까 나 먼저 학교 가요! 내일 새벽에도 나와요, 오빠!”

아현은 가방을 메고 다시 언덕 아래로 씩씩하게 뛰어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소녀의 주황색 트레이닝복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지호는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새벽 거리에 울려 퍼졌다. 늘 차갑고 괴롭기만 했던 새벽 바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졌다.

[제3화 예고]

학교 태권도부 강제 해체 당일, 아현은 체육관 문을 잠가버리고 홀로 농성을 시작한다. 한편, 지호의 만화방으로 정체불명의 사채업자들이 찾아와 난장판을 피우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