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omance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제 1화 쏟아진 커피, 그리고 시작된 운명

by AK98 2026. 5. 2.

5월의 서울은 유난히도 눈부셨다. 한강 위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창백한 오피스 빌딩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강남 한복판의 공기는 갓 볶아낸 원두의 향기와 바쁜 발걸음들로 가득 찼다.

"할 수 있어, 이다은! 오늘부터 진짜 시작이야."

다은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정성스럽게 다린 화이트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슬랙스, 그리고 신입사원다운 풋풋함이 묻어나는 미소. 그녀는 오늘 대한민국 패션계의 심장부라 불리는 'JS 패션'의 마케팅팀 신입사원으로 첫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꿈에 그리던 회사였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밤새워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공모전을 휩쓸며 얻어낸 값진 기회였다. 다은은 긴장을 풀기 위해 회사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을 샀다. 컵 홀더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그녀의 떨리는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자, 이제 15분 전. 완벽해!"

다은은 시계를 확인하며 세련된 유리 외벽의 JS 패션 사옥으로 발을 내디뎠다. 로비는 이미 출근하는 직원들로 북적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다은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홀로 향하던 다은의 눈에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편 귀빈용 엘리베이터에서 서류 뭉치를 보며 빠른 걸음으로 나오던 한 남자가 있었다.

"어...?"

다은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느라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였고, 남자는 방금 받은 보고서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고 다은의 발이 살짝 미끄러지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철퍽!

"악!"

다은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카페라떼가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비상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짙은 네이비색 수트 정중앙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얀 셔츠 위로 갈색 액체가 빠르게 번져 나갔다. 다은은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조각 같은 턱선과 날카롭지만 깊은 눈매를 가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아! 어떡해! 정말 죄송합니다!"

다은은 정신을 차리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자의 가슴팍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상대방이 누구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제가... 제가 너무 긴장해서... 정말 죄송해요. 세탁비는 제가 꼭...!"

다은의 손길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 근육 근처를 허둥지둥 오갔다. 그때, 남자가 다은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됐습니다. 그만하죠."

낮고 차분한 목소리. 남자의 눈동자가 다은을 향했다. 다은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첫 출근인가 보군요? 신분증 목걸이가 새것인 걸 보니."

"네? 아... 네! 오늘 마케팅팀으로 첫 출근하는 이다은이라고 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은이 90도로 허리를 숙이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은은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악과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

남자는 젖은 수트 재킷을 망설임 없이 벗어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다은을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찰나의 미소였지만, 그 미소는 다은의 심장을 거세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다은 씨. 첫날부터 강렬한 인사를 받았네요. 옷은 걱정 마세요. 대신, 마케팅팀 신입사원이라면 이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지 기획안이라도 하나 더 내놓는 게 세탁비보다 유용할 겁니다."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 다은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한 선배 직원이 다은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신입, 제정신이야? 방금 저 사람, 우리 회사 강서준 사장님이라고! 회장님 막내아들!"

"네?! 사... 사장님요?"

다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첫 출근, 첫 사고, 그리고 그 대상이 회사의 최고 경영자라니. 서울의 봄볕은 여전히 따스했지만, 다은의 눈앞은 아찔한 노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손이 닿았던 손목만큼은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앞으로 펼쳐질 폭풍 같은 나날의 예고편이라는 사실을, 다은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음 회 예고] 사장실로 호출된 다은! 해고 통보일까, 아니면 뜻밖의 제안일까? 강서준 사장이 그녀에게 건넨 첫 번째 업무의 정체가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