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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ce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제4화: 떨리는 발표, 그리고 반전의 서막

by AK98 2026. 5. 2.

JS 패션 본사 15층 대회의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다은은 차가운 손바닥을 치마에 연신 문질러 닦았다. 회의실 정중앙에는 서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는 쟁쟁한 마케팅팀의 베테랑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입사원이 기획한 안이라고요? 너무 감상적인 것 아닙니까?"

발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마케팅본부의 최 이사가 찬물을 끼얹었다. 최 이사는 JS 패션의 보수적인 라인을 대변하는 인물로, 서준의 파격적인 행보를 내심 견제하고 있었다.

"패션은 숫자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추억'이니 '온기'니 하는 단어들은 마케팅 지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이다은 씨, JS 패션이 자선 단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다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젯밤 서준과 편의점에서 나눴던 대화를 토대로 '옷에 담긴 이야기'를 강조한 기획이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다은은 당황해 서준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도와줄 기색 없이 턱을 괸 채 차가운 시선으로 다은을 보고만 있었다.

'도와주지 않으시는구나... 결국 이건 내 몫이야.'

다은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최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패션은 비즈니스죠. 하지만 요즘 소비자들이 100만 원이 넘는 에코 라인을 사는 건 단지 '옷'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사는 거죠. 제 기획안에 담긴 '메모리 태그'는 이 옷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났는지 디지털로 보여줍니다. 이건 단순한 감성이 아니라, 브랜드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강력한 데이터가 될 것입니다."

다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서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은은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라떼를 쏟았던 그 날, 저는 사장님의 수트가 단지 비싼 옷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옷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던 사장님의 열정이 보였죠. '리-본' 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깃든 원단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뛰는 심장이 되는 것, 그게 JS 패션이 보여줘야 할 진정한 럭셔리라고 생각합니다."

발표가 끝나자 회의실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최 이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다은에게 다가왔다.

"메모리 태그라... 기술팀과 협의해서 당장 구현 가능성 타진하세요. 이다은 씨의 안을 메인 컨셉으로 확정하겠습니다."

서준의 단호한 결정에 회의실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준은 얼어붙어 있는 다은의 곁을 지나가며, 오직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각보다 훨씬 뜨거운데요, 이다은 씨 기획안."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다은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누군가 다은의 책상 위에 차가운 캔커피 하나를 놓았다.

"잘했어. 우리 사장님, 웬만해서는 남들 앞에서 칭찬 안 하시는데."

지수 과장이 윙크를 하며 지나갔다. 다은은 캔커피를 손에 꼭 쥐었다. 차가운 캔의 감촉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오후, 다은은 탕비실에서 우연히 서준과 다시 마주쳤다. 서준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장님!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실 저 너무 떨려서 도망치고 싶었거든요."

다은이 수줍게 인사하자, 서준이 컵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도와줄 줄 알았습니까? 이건 비즈니스예요, 다은 씨. 실력이 없었다면 나도 가차 없이 기각했을 겁니다."

서준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지만, 다은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의 차가운 말투 속에 숨겨진 단단한 신뢰를.

"그래도요. 사장님이 저 믿어주신 거 다 알아요. 아, 그리고... 이 옷 세탁비 대신 제가 맛있는 저녁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다은의 돌직구 제안에 서준의 눈이 커졌다. 대한민국 패션계의 황태자라 불리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신입사원은 다은이 처음이었다.

서준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글쎄요. 내 저녁 식사 예약은 꽉 차 있는 편이라. 하지만... 신입사원의 열정을 봐서 빈틈을 좀 만들어 보죠. 이번에도 편의점은 아니겠죠?"

서울의 노을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JS 패션의 좁은 탕비실 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이제 더 이상 차가운 오피스의 그것이 아니었다.

 

[다음 회 예고] 드디어 다은과 서준의 첫 번째 공식적인 (?) 저녁 데이트! 서준이 다은을 데려간 곳은 화려한 레스토랑이 아닌, 예상 밖의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다은은 서준의 의외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