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단편소설] 런웨이 위의 라떼 - 제18화: 다시 태어난 계절, 새로운 이름으로

by AK98 2026. 5. 14.

폭풍이 휩쓸고 간 JS 패션의 아침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기로 가득했다. 로비를 지날 때마다 들려오던 수군거림은 이제 존경과 선망이 담긴 인사로 바뀌어 있었다. 다은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을 보며 미소 지었다. 컵홀더에는 서준의 정갈한 글씨로 ‘오늘도 고생해요, 나의 디렉터’라고 적혀 있었다.

이사회의 결정은 파격적이었다. 유채영 실장은 조작 및 명예훼손으로 해임되었고, 그녀가 맡았던 신규 브랜드 총괄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강 회장은 그 자리에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마케팅팀 신입사원 이다은을 ‘리-본(Re-Born)’ 라인의 메인 디렉터로 임명한다.”

입사 몇 달 만에 팀원에서 디렉터로, 그야말로 ‘라떼 신입’의 화려한 비상이었다. 다은은 사령장을 손에 쥐고도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지수 과장이 다가와 다은의 등을 시원하게 두드렸다.

“다은 씨, 아니 이제 이 디렉터님! 이건 운이 아니라 다은 씨가 증명해낸 결과야. 축하해!”

사무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은은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이제 울기보다는 웃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곧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서준이 창밖을 보고 있다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축하합니다, 이 디렉터. 이제 사장님 지시 안 받고 마음대로 디자인해도 되겠는데요?”

“무슨 말씀을요. 사장님이 제 1호 모델이 되어주셔야 할 일이 산더미인걸요.”

다은의 너스레에 서준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창가에 서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리-본’ 라인의 글로벌 런칭이 확정되면서, 파리와 뉴욕의 유명 편집숍에서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었다. 버려진 것들에 새 숨을 불어넣는 다은의 철학이 전 세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서준 씨, 가끔 무서워요. 너무 꿈만 같아서요. 첫날 커피를 쏟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서준은 다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주머니 속으로 쏙 넣었다.

“글쎄요. 어떤 식으로든 나는 당신을 찾아냈을 겁니다. 내 수트가 아니라 내 심장에 색을 입힐 사람은 이다은, 당신뿐이니까.”

며칠 뒤, 서울의 한 명소에서 ‘리-본’ 라인의 글로벌 런칭 기념 가라 파티가 열렸다. 국내외 패션계 인사들이 모두 모인 화려한 자리였다. 다은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할머니의 자수 문양이 우아하게 새겨진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홀의 조명이 서서히 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중앙으로 쏠렸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대형 스크린에는 다은이 처음 기획안을 쓰던 순간부터 창신동 골목을 누비던 모습, 그리고 런웨이에 섰던 순간까지의 기록들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다은은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런웨이 한가운데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쳤고, 그곳에는 꽃다발을 든 서준이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냉철한 사장이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떨리는 눈빛을 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여러분, 잠시만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서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다은의 심장이 멎을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는 평생 완벽한 옷을 만드는 법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옷보다 중요한 건 그 옷을 입고 함께 걷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저에게 가장 큰 기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서준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다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티장의 모든 카메라가 두 사람을 향했다.

“이다은 씨. 당신이 쏟은 그 라떼보다 더 뜨겁게, 당신을 평생 사랑하고 싶습니다. 내 인생이라는 런웨이를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습니까?”

서준이 작은 상자를 열자, 다은의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목련 문양을 본뜬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다은은 입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서울의 밤하늘보다 더 눈부신 프로포즈였다.

 

[다음 회 예고] 서준의 로맨틱한 프로포즈, 그 대답은? 그리고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꽃길 같은 미래. 하지만 결혼 준비는 프로젝트보다 더 험난하다?! ‘라떼 커플’의 유쾌하고 달콤한 웨딩 준비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