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의 파격적인 보호 덕분에 사내의 따가운 시선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다은은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리-본(Re-Born)' 프로젝트의 성패가 이제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서준의 안목까지 증명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첫 번째 샘플 의상이 나오는 날. 다은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 샘플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완성된 옷이 아니라, 난감한 표정의 패턴사와 엉망이 된 원단이었다.
"이다은 씨, 미안하게 됐어. 재활용 원단이라 그런지 박음질 단계에서 자꾸 올이 풀리네. 일반 기계로는 이 특수 자수(메모리 태그)를 박기가 어려워."
다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일 오전이면 임원진에게 최종 샘플을 공개해야 했다. 지금 다시 원단을 구하고 공장을 수소문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가 해볼게요. 제가 손바느질로라도 고정해 보겠습니다."
다은은 작업대 앞에 앉았다.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샘플실,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그녀는 한 땀 한 땀 바늘귀를 꿰었다. 손가락 끝이 바늘에 찔려 피가 맺혔지만, 다은은 멈추지 않았다. 이 옷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그녀의 진심이었으니까.
밤 11시. 적막한 샘플실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아직도 여기 있었습니까?"
서준이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며 다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은의 밴드투성이 손가락을 본 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손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사장님... 아, 그게... 기계가 안 된다고 해서요. 내일 발표하려면 어떻게든 오늘 안에 끝내야 하거든요."
서준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은의 손에서 바늘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실을 꿰어 다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장님이 바느질을요?"
"JS 패션 오너 일가는 기본적으로 옷을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단추 다는 법부터 가르치셨죠."
서준의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서류를 검토하고 결재를 하던 그 손이, 이제는 다은과 함께 해진 원단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한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바늘이 천을 통과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이다은 씨."
"네, 사장님."
"아까 낮에 했던 말, 진심이었습니다. 나는 다은 씨가 가진 그 '진심'을 믿어요.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으니까."
서준이 고개를 들어 다은을 바라보았다. 스탠드 조명 아래 비친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깊고 다정했다. 다은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믿어주는 만큼,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새벽 2시. 마침내 마지막 매듭이 지어졌다. 완성된 '리-본' 자켓은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신비로운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완성이에요! 정말 예뻐요, 사장님!"
다은이 아이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그런 다은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서준은,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다은의 어깨 위로 고개를 툭 떨궜다.
"잠깐만... 5분만 이러고 있읍시다. 너무 열심히 달렸더니 좀 졸리네요."
다은은 얼어붙었다. 어깨에 닿은 서준의 머리카락 촉감과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체온이 옷감을 뚫고 다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울의 밤은 깊었고, 잠든 서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다은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사장님. 아니... 서준 씨."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밤샘 작업은 그렇게 따뜻한 온기 속에서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완성된 샘플을 확인하러 온 누군가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음 회 예고] "이게 최선인가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서준의 약혼녀(?) 후보, 유채영 실장! 그녀의 날카로운 비평 앞에 다은의 샘플은 위기에 처하고, 서준과 채영 사이의 미묘한 과거가 밝혀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