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공식적인 인정과 축복을 받은 이후, 윤서와 태현을 누르던 마지막 먹구름마저 깔끔하게 상쾌한 바닷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느덧 청호리에는 짙푸른 녹음과 시원한 파도 소리가 가득한 한여름이 찾아왔다. 마을 전체가 아침부터 시끌벅적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매년 백사장에서 열리는 ‘청호리 여름 바다 축제’와 함께 태현의 서핑 숍 ‘청호 웨이브’가 주관하는 동해안 시니어·아마추어 서핑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원장님! 이것 좀 보세요, 어촌계장님이 오늘 축제라고 전복이랑 소라를 한 가득 쪄서 가져오셨어요!"
조무사 경희가 신이 나서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치과는 오늘 하루 특별 휴무를 맞이해 축제 준비를 돕고 있었다. 가운 대신 편안한 리넨 원피스에 넓은 챙모자를 쓴 윤서는 대기실 창밖으로 펼쳐진 축제 현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해변가에는 만국기와 화려한 깃발이 날리고 있었고,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마을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포구 가득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억눌릴 필요가 없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었다.
"윤서 씨!"
치과 문이 열리며 서핑 수트를 상체까지 내려 묶은 태현이 들어섰다. 구릿빛 피부 위로 건강한 땀방울이 반짝이고 있었고, 윤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오늘도 햇살보다 뜨겁게 빛났다.
"대회 개막식 이벤트로 주최자 서핑 시연이 있거든요. 맨 앞줄에서 봐줄 거죠?"
"그럼요. 제일 크게 응원할 테니까 멋지게 파도 타고 와요."
윤서가 태현의 땀을 가볍게 닦아주며 말하자, 태현은 윤서의 볼에 슬쩍 살가운 입맞춤을 내리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윤서의 얼굴이 노을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오후 2시,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청호리 앞바다에서 서핑 시연이 시작되었다.
거센 너울성 파도가 밀려드는 순간, 태현이 보드 위에 가볍게 솟구쳐 올랐다. 파도의 결을 따라 유려하게 미끄러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바다 그 자체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거대한 파도의 터널을 뚫고 나오며 보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태현의 모습에 백사장에 모인 수백 명의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와! 공태현 멋지다!" "우리 청호리 맥가이버 만세!"
윤서 역시 백사장 맨 앞에서 손을 흔들며 목이 쉬어라 태현을 응시했다. 은빛 윤슬을 가르며 파도 위에 선 태현의 모습은 윤서의 가슴을 또다시 가파르게 뛰게 만들었다.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청호리 해변은 주황빛과 보랏빛이 섞인 장엄한 노을로 물들었다. 축제의 열기가 밤바다의 잔잔함 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태현이 윤서의 손을 가만히 잡고 마을 포구 구석에 정박해 둔 자신의 목조 배로 이끌었다.
"어디 가요, 태현 씨?"
"웩웩거리며 시끄러운 축제장은 잠시 벗어나서, 진짜 축제를 즐기러 가야죠."
태현이 배의 시동을 걸고 천천히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몰았다. 포구의 불빛이 멀어지고 사방이 오롯이 보름달빛과 별빛으로 가득 찼을 때, 태현이 엔진을 끄고 배 앞머리에 조그만 조명들을 켰다.
"와……"
배 테라스 주변으로 은은하게 켜진 감성적인 앵두 알전구들이 밤바다의 물결에 반사되어 장관을 이루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밤의 윤슬과 배 위를 가득 채운 온화한 조명이 마치 바다 위에 뜬 작은 우주를 연상시켰다.
태현은 배 안쪽에서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지난번에 윤서 씨한테 선물했던 전복 껍데기 화분 기억나죠? 그 전복 자개 조각을 오려서 만든 겁니다."
윤서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밤바다의 은빛 윤슬과 잔물결 모양을 그대로 본뜬 정교한 은빛 펜던트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현이 직접 깎고 세공한 손수 만든 자개 목걸이였다.
"윤서 씨."
태현이 목걸이를 꺼내 윤서의 목에 직접 걸어주며, 그녀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
"처음 청호리에 윤서 씨가 왔을 때, 상처받고 외로워 보이던 눈빛이 잊히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윤서 씨 눈 안에는 이 청호리 바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윤슬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태현의 손길이 윤서의 뺨에 따뜻하게 닿았다.
"저는 윤서 씨가 어디에 있든, 어떤 꿈을 꾸든 늘 이렇게 곁에서 가장 넓은 바다가 되어줄 겁니다. 제 모든 계절을 윤서 씨와 함께 보내고 싶어요."
달빛과 전구 불빛이 어우러지는 밤바다 한가운데에서, 태현의 진심 어린 고백이 파도 소리와 함께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윤서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고마워요, 태현 씨… 제 삶에 찾아와 준 가장 찬란한 바다가 되어줘서."
윤서는 태현의 목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은빛 윤슬의 축복 속에서 깊고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도망쳐 온 외로운 섬이었던 윤서의 삶은, 마침내 태현이라는 바다를 만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19화 예고] 두 사람의 깊어진 사랑 속에서 청호리 치과는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보건 케어 센터로 한층 더 발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태현과 윤서는 함께 걸어갈 영원한 미래를 위한 아주 특별한 리마인드 세레머니를 준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