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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슬이 반짝이는 마을-제2화:은빛 조개껍데기와 첫 번째 환자

by AK98 2026. 6. 27.

'바른 바다 치과의원'의 공식적인 개원 첫날 아침이 밝았다.

윤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의사 가운을 입었다. 서울의 대형 치과에서 근무할 때는 매일 아침 숨 막히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기계적으로 환자 차트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곳 청호리에서의 아침은 완전히 달랐다. 창문만 열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동해 바다가 싱그러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고, 파도 소리가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후우, 할 수 있어. 이혜윤.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윤서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울을 떠나올 때 느꼈던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과 실연의 상처는 바다 안개 속으로 조금씩 흩어지는 듯했다.

오전 10시. 드디어 치과의 자동문 스위치를 켜고 정식 진입로를 열었다. 서울 같았으면 개원 축하 화환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예약 환자들의 전화가 빗발쳤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청호리의 시간은 고요하게만 흘렀다. 대기실 소파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접수대 위의 전화기는 야속할 정도로 조용했다.

'첫날이라 아무도 안 오려나… 홍보를 더 했어야 했나?'

조바심이 나기 시작할 무렵, 딸랑하는 도어벨 소리와 함께 정적을 깨고 문이 열렸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머, 어서 오세요! 바른 바다 치과입…"

그러나 윤서의 환영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동네 할머니 세 분이었다. 맨 앞에 선 할머니는 품에 커다란 양은 대야를 안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갓 쪄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밤고구마가 가득했다.

"아이고, 이 집이 새로 생긴 이 빼는 집인교? 뜨뜻할 때 고구마 좀 묵어봐라."

옆집에 산다는 박 씨 할머니가 대야를 대기실 테이블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김 씨, 이 씨 할머니는 신기한 듯 치과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야야, 서울 의사라 카더니 참말로 인형처럼 곱네 곱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놔서 그런지 천국이 따로 없다야. 우리 노인정보다 낫네."

할머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얀 대기실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흙 묻은 손으로 고구마를 껍질째 툭툭 까서 윤서에게 내밀었다. 서울의 병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멸균과 위생이 생명인 치과 대기실이 순식간에 시골 사랑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저… 어르신들, 여기는 병원이라 음식을 드시면…" 윤서가 조심스럽게 제지하려 했지만, 할머니들의 수다 폭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생은 나이가 몇인고? 시집은 갔는가?" "와 이런 외딴 시골까지 내려왔대? 서울서 사고 치고 도망 온 건 아니제?" "아이고, 눈매를 보니 심성은 착하게 생겼다. 우리 셋째 아들이 아직 장가를 안 갔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특히 '결혼'과 '서울에서 온 이유'에 대한 질문은 윤서의 아픈 구석을 쿡쿡 찔렀다. 부모님의 반대로 깨진 결혼, 그리고 도망치듯 내려온 청호리. 윤서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려던 찰나,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할매들! 개원 첫날부터 여기서 사랑방을 차리시면 어떡합니까? 원장님 곤란해하시잖아요!"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편안한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가 한눈에 들어왔다. 태현은 들어오자마자 할머니들의 주의를 단박에 가로챘다.

"아이고, 태현이 왔나! 야가 청호리 맥가이버 아이가." "태현아, 너도 고구마 하나 묵어라. 달다."

"고구마는 나중에 먹고요. 할매들, 이 원장님 엄청 대단한 분이에요. 서울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치과에 계시다가, 청호리 어르신들 이 아픈 거 고쳐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오신 거라고요. 그러니까 영업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세요."

태현이 너스레를 떨며 할머니들을 말리자, 할머니들은 그제야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가 눈치가 없었네. 의사 선생님, 고구마 맛있게 묵고 우리 이 아플 때 잘 봐주이소."

할머니들이 나가고 대기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윤서는 참았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태현은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셨죠? 시골 분들이 정은 많은데 조금 서글서글하셔서 그래요. 악의는 전혀 없으십니다." "아니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태현 씨. 벌써 두 번째나 신세를 지네요."

"신세는 무슨요. 아, 참! 이거 개원 축하 선물입니다."

태현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작은 물건을 윤서에게 건넸다. 그것은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화분이었다. 청호리 바닷가에서 주운 크고 단단한 전복 껍데기를 깨끗하게 씻고 광을 내어, 그 안에 초록빛 다육식물을 정성스럽게 심어둔 것이었다. 전복 껍데기의 안쪽 면이 햇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였다.

"우와… 정말 예뻐요. 전복 껍데기로 이런 화분을 만들 생각을 하셨네요?" "이 동네 바다가 키워낸 녀석입니다. 윤서 씨 치과랑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어제 퇴근하고 뚝딱 만들어봤어요. 화분 이름은 '청호리의 봄'입니다."

윤서는 화분을 조심스럽게 받아 접수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반짝이는 조개껍데기와 파릇파릇한 초록 식물이 삭막했던 병원 분위기를 단숨에 따뜻하게 바꾸어 놓았다. 태현의 세심하고 다정한 마음씨가 화분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때, 조금 전 나갔던 박 씨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고구마 대야가 없었다. 대신 한 손으로 볼을 꼭 쥔 채 찡그린 표정이었다.

"저… 의사 선생님. 사실은 내가 며칠 전부터 어금니가 욱신거려 삼킬 수가 없는데… 정말 안 아프게 해 주능교?"

태현이 눈짓으로 윤서에게 응원을 보냈다. 윤서는 가운 옷깃을 여미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어머님. 아주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모실게요."

치과 의사 이윤서의 청호리에서의 첫 진료, 그리고 진정한 청호리 주민들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접수대 위에서 태현이 선물한 무지갯빛 조개 화분이 두 사람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