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통유리 너머로 보이던 서울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낮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마케팅팀 사무실엔 다은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에어컨의 기계음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리-본(Re-Born) 라인... 단순히 재활용이 아니라, '기억의 부활'이어야 해."
다은은 중얼거리며 모니터 속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준이 준 자료는 방대했다. JS 패션이 가진 기술력은 최고였지만, 에코 라인이 대중에게 주는 이미지는 여전히 '비싼 재활용품'에 머물러 있었다. 다은은 이 간극을 메우고 싶었다. 옷 한 벌에 담긴 진심이 소비자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 그녀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낡은 한복을 가방으로 만들어 주셨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획안을 채워 나갔다.
"꼬르륵—"
고요를 깨는 민망한 소리. 다은은 배를 움켜쥐며 시계를 봤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몰두한 탓에 속이 비어 있었다.
"아,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다은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려던 찰나,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규칙적이고 묵직한 소리. 이 시간에 누가? 다은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재킷을 팔에 걸치고 셔츠 단추를 하나 푼 서준이 서 있었다.
"사장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서준은 다은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자료들과 켜져 있는 모니터를 슥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스쳤다.
"이다은 씨야말로. 첫날부터 야근이라니, 내가 너무 무리한 과제를 줬나 보군요."
"아니에요! 자료가 너무 흥미로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특히 리-본 라인의 철학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다은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서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때, 다시 한번 다은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 "......"
정적이 흘렀다. 다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했다. 서준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획안 쓰다 사람 잡겠네요. 따라와요. 우리 회사 사훈 중 하나가 '직원을 굶기지 말자'거든요. 물론 방금 내가 만든 거지만."
서준이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다은은 얼떨결에 짐을 챙겨 그의 뒤를 쫓았다. 고급 레스토랑이라도 갈 줄 알았건만, 서준이 멈춰 선 곳은 사옥 뒷골목의 작은 편의점이었다.
"사장님이 편의점을요?"
다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서준은 익숙하게 바구니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나도 사람입니다. 가끔은 미슐랭 요리보다 3분 만에 익는 컵라면이 간절할 때가 있죠. 자, 골라봐요. 오늘은 내가 라떼 값 대신 쏘는 거니까."
두 사람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밤공기는 적당히 선선했고,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비췄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사장님은 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신 거예요? 사실 큰 수익이 안 날 수도 있잖아요."
다은이 조심스럽게 묻자, 서준은 젓가락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릴 때, 어머니가 아끼시던 실크 드레스가 있었어요. 실수로 찢어졌는데, 어머니는 그걸 버리지 않고 작은 손수건으로 만드시더군요. 물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으셨죠. 저는 패션이 단순히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화려한 재벌 3세의 모습 뒤에 숨겨진 진심 어린 열정. 다은은 그 순간, 서준이 아까보다 훨씬 더 근사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도요! 저도 패션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고 믿어요."
다은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준은 그런 다은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리-본 라인의 미래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이다은 씨, 기획안 기대해도 되겠는데요."
서준의 말에 다은의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첫 출근의 실수와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기분 좋은 설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울의 밤은 깊어갔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컵라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눈 짧은 대화는, 냉철한 사장님과 어리바리한 신입사원 사이의 벽을 아주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다음 회 예고] 드디어 다은의 기획안 발표 날! 하지만 뜻밖의 복병이 나타나 다은을 위기로 몰아넣는데... 과연 서준은 다은의 손을 들어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