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로 돌아온 윤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진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비쳐 드는 진료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지만, 한 달 뒤면 이 모든 공간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시려왔다. 이제 막 마음을 붙이고 진짜 의사로서의 보람을 찾기 시작한 곳이었다. 청호리의 파도 소리와 은빛 윤슬이 매일 아침 그녀를 위로해 주던 이곳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윤서 씨.”
어느새 다가온 태현이 윤서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차가운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이 닿자 참았던 눈물이 결국 툭 하고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태현 씨… 나 때문에 태현 씨까지 그 사람에게 심한 소리를 듣게 하고… 나 때문에 이 조용한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요.”
“그게 왜 윤서 씨 탓입니까?”
태현이 속상한 듯 미간을 좁히며 다정한 목소리로 윤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돈과 힘으로 남의 소중한 터전을 흔드는 사람이 나쁜 거지, 지키려는 윤서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청호리 바다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만큼 만만한 곳인 줄 압니까? 걱정 마요. 내가 이 건물, 그리고 윤서 씨 치과 꼭 지킬 테니까.”
그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며 윤서는 울컥하는 와중에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날 밤, 태현은 곧바로 청호리 청년회와 어촌계를 소집했다. 평소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결하며 신망이 두터웠던 태현이었기에, 그의 긴급 호출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주민이 마을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태현아, 이 밤중에 무슨 급한 일이고?”
어촌계장님이 담배를 털며 물었다. 태현은 낮에 있었던 최 사장의 건물 매각 소식과 새 건물주가 한 달 내로 치과를 비우라고 통보한 사실을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전달했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이제 겨우 우리 마을에 좋은 의사 선생 들어와서 이 아픈 걱정 덜었는데, 나가라니!”
“맞다! 박 씨 할매 틀니도 새로 맞추고, 나도 어제 스케일링 받고 왔는데! 서울 대기업 놈들이 돈 좀 있다고 시골 사람들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기가?”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늘 얌전하고 조용하게만 보였던 어촌 마을 사람들이 치과의 위기 앞에 제 일처럼 소리를 높였다.
태현은 회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미리 준비해 둔 청호리 리조트 개발 계획 서류를 붙였다.
“여러분, 제가 시청에 있는 친구를 통해 급히 확인해 본 결과가 있습니다. 한민우 씨 측에서 이 건물을 허물고 지으려는 리조트 배후 시설은 단순한 상가 건물이 아닙니다. 대규모 오폐수 처리 관련 임시 시설이 포함되어 있어요.”
태현의 말에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폐수? 그렇다면 우리 앞바다 양식장이나 해변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이 간다는 소리 아이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대기업의 편법을 이용해 주민 동의 절차를 교묘하게 우회했습니다.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발 면적을 쪼개서 신청한 정황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건물은 40년이 넘은 노포 상가 건물로, 과거 청호리 포구의 시초를 상징하는 지역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 목록에 들어가 있습니다. 주민들의 동의 없는 일방적인 철거는 명백한 절차적 하자입니다.”
태현의 철두철미한 분석과 준비성에 주민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소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허허 웃던 ‘동네 맥가이버’ 태현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냉철한 리더로 변모해 있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저들은 돈으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로 뭉쳐서 이 불법적인 절차를 고발하고, 치과 건물의 역사적 보존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과 1인 시위를 시작하면 저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언론과 시청 환경과에 민원을 대대적으로 넣을 예정입니다.”
태현이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윤서 원장님은 우리 청호리 사람들을 위해 내려와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원장님의 방파제가 되어줄 차례입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태현이 네가 앞장서라, 우리가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마!”
어촌계장님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마을 회관은 주민들의 뜨거운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치과 출근길에 나선 윤서는 포구 초입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포구 앞 광장에 커다란 천막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붉은 글씨로 쓰인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청호리의 자랑 ‘바른 바다 치과’ 일방적 철거 결사반대!] [불법 편법 리조트 개발, 청호리 주민들은 거부한다!]
그리고 천막 안에는 박 씨 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이 붉은 머리띠를 두른 채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서명 용지를 돌리고 있었다. 태현은 그 옆에서 확성기를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주민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서의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졌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연대감과 따뜻한 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밀려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파제가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굳건한 용기를 불어넣었다.
태현이 멀리서 서 있는 윤서를 발견하고는, 확성기를 잠시 내리고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아침 해를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청호리 바다보다 훨씬 더 눈부셨다.
[이어지는 10화 예고] 마을 주민들의 거센 반발과 법적 절차 문제에 봉착한 한민우. 초조해진 그는 윤서의 부모님을 청호리로 직접 모셔와 윤서를 한층 더 강하게 압박하려 하는데…!